brunch

매거진 여러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경 Oct 29. 2017

기억과 추억

세미나에서 나눠준 기억에 관한 글을 읽다가 '추억'이 떠올랐다. 둘은 비슷한 의미면서도 참으로 다른 의미다. 기억과 추억은 더불어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두가지 방향이란 생각이 들었다. 

-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의 주체성을 고취시켰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인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신하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고 바꾸는 근대인을 낳았다. 현대에서는 이를 '성찰(메타)'이라고 말한다.

-

자기 자신을 의심하다는 것은 무얼까? 바로 기억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기억은 경험의 자식이다. 그가 말하는 '명석판명'이란 자신이 낳은 자식(=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신뢰한단 의미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데카르트다운 접근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성찰'은 근대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어쩌면 원리주의에 가까울지도. 

-

저자보다는 독자가 중요한 시대. 의도보다는 해석이 판치는 세상이다. 데카르트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했던, 사람들은 그 명제를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했고, 근대의 주체성을 주조해냈다. 동시에 기억을 의심했고, 기록을 신뢰했다.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하는데 몰두했다. 과연 인쇄시대다운 발상이자 흐름이었다. 

-

기록이란 무슨 의미일까. 데카르트의 시대가 부정한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존재의 확신으로 친구를 끌어들인다. 내가 무언가를 확신하는 것은 그것을 함께 본 친구, 함께 경험한 친구가 있어서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나의 기억을 확신하며, 그 또한 그렇다. 공유된 그 기억은 '추억'이 된다. 

-

'추억'을 만드는 방식은 함께 경험하고 서로 대화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않다. 너무나 좁은 경험, 대화에 갇히게 된다. 추억도 줄어든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 아주 유용한 방법이 발명되었는데 바로 '기록'이다. '기록'을 해 둔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과 대화, 즉 엄청난 '추억'을 쌓을 수 있다. 우리가 데카르트를 기억, 아니 추억하는 이유도, 또 그 추억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지금 쓰고 있는 '문자'에 의한 '기록' 덕택이 아니던가. 

-

4세기 어거스틴은 성 암브로시우스의 묵독(소리 내지 않는 독서법)에 감탄한다. 11세기 즈음, 문장에 구둣점이 등장하고, 띄어쓰기 및 여러 문장부호가 붙으면서 묵독은 더욱 가능해졌다. 혼자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이와 함께 대화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고독'하지만 외로운 감정은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는 이 기록과 추억의 혜택을 입은 자다. 이를 통해 인식의 대혁명, 과학혁명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추억을 통해 기억을 의심했고, 이후 기억은 추억에 밀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갔다. 추억이 아닌 자신의 기억에 빠지는, 바로 주체성의 함정에 빠졌다. 이후 이 함정은 여러 주체사상, 가령 북한의 주체사상 같은 섬세한 민족 이념들을 낳았다. 

-

그럼 기억은 무엇일까. 나는 기억은 '글'이 아닌 '말'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혼자의 경험, 홀로의 독백이 가져온 생각의 틀이 바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야만로 진정한 '주체성'의 기반이지 아닐까 싶다. 그 기억이 추억에 의해 굴절되면서 우리의 주체성은 흔들리고, 정체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 확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메타(성찰)이 아닐까 싶다. 

-

기억이 메타(성찰)이라면, 추억은 크리틱(비판)이 된다. 자신이 경험하고 공부했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개념을 주조하는 것. 이를 통해 인식을 한정짓고, 이것을 통해 세상을 다시 경험하는 태도. 이것이 기억이 아닐까. 때문에 기억은 굳이 추억을 통하지 않고도 이미 그 스스로의 자정 작용이 있다. 이 자정 작용이 제대로 작동할때 인간은 비로소 '살아 있음'을 확신한다. 

-

그렇다. 인간은 두가지 방향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느낀다. 하나는 기억, 다른 하나는 추억이다. 기억은 내면에서 끌어오르는 감정이고, 추억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존중이다.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파크가 튀면서 기억은 재구성되고, 추억이 쌓이게 된다. 도는 생이요, 덕은 축이라는 점에서 기억과 추억은 바로 도덕이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진리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진리란 진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기억'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둘 모두 도덕적 진리의 구성요소다. 

-

나는 이 글을 갈무리하면서 처음엔 의도치 않았던 단어 하나가 새롭게 떠올랐다. 바로 '역사'다. 역사는 기억일까 추억일까... 선뜻 든 생각은 역사는 기억에서 멀고, 추억에서는 가깝다. 하지만 추억은 아니다. 그럼 역사는 기억과 추억과 무엇이 다를까... 바로 도식이 하나 떠올랐다. 인식 대상들의 집합과의 관계 도식이. 그 도식을 따져보면 이렇다. 

-

'기억은 개인의 활동'이다. 이는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추억은 친구들과의 활동'이다. 기억보다는 다소 왜곡될 가능성이 낮지만, 이 또한 편견이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반면 '역사는 모두의 활동'이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사는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야한다는 강박감에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기억과 추억 사이를 역사적 개념으로 경유해 '기억으로서의 역사=사생활'과 '추억으로서의 역사=집단생활'을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점에서 '모두'라는 모호함 뒤에 숨어있는 역사는 명확한 '개인(역사가)'과 '집단(기록)' 사이에 있는 어떤 사실이 아닐까. 

-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사실'이라는 꼬리표를 붙혀 '역사적 사실'이란 표현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를 '확증된 사실'로 여기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역사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다른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에 의해 굴절되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가 국사에서 문명사로 나아가 세계사가 될때 그 역사적 사실은 '진리'가 될 것이다. 유일신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교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