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과학적 방법은 인간이성의 지극히 보편적인 작용이다"라고 쓰고 있다. 과학은 우리의 이성이 작용하고 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이성이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가르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 또는 화학 등 하나의 과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겸손과 올바른 시각, 그리고 균형의식을 부여하는 도덕적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그들 특정 학문에서의 불확실성은 인정하면서도, 어떤 사회적, 정치적 교조에 대해 굳건한 신념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의 '추락'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지식이 신의 의지를 초월했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종말> 닐 포스트먼, 96-97p
오토 제스퍼슨이라는 데인족의 한 유명한 영어역사학자는 왜 영어 단어 중에 'cow, swine, sheep, calf'와 같은 조리 전의 육류를 가리키는 말들이 색슨어에서 유래된 반면에 'beef, pork, mutton, veal'과 같은 조리된 육류를 가리키는 말들은 노르만 언어에서 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의 해석은, 노르만이 색슨을 침공해서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에, 색슨족들은 부엌에서는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식탁 주변에서는 그들 주인들의 언어인 노르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또 미스터리를 낳게 되는데, 바로 영어의 'breakfast'란 단어는 색슨족의 언어였으며, 'dinner, supper'는 노르만족의 언어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노르만족들은 점심때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교육의 종말> 닐 포스트먼, 194
책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저자다. 게다가 이 유식함을 유머러스하게 쓸 줄 안다. 보통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 '생각을 쓴 글'과 '느낌을 쓴 글'이 있다. 전자는 유익하지만 감동은 덜하고, 후자는 감동적이지만 유익함은 덜하다. 전자는 내용으로, 후자는 글맛으로 승부한다. 전자는 새로움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후자는 익숙한 것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런데 포스트먼은 이 둘을 모두 적절하게 겸비하고 있는 드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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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느낌을 역사학자 이병한 박사에게도 받는데, 그의 글은 의미 밀도가 높은 단어들을 운율적으로 조합해 독자들로 하여금 격동적 흥분을 느끼도록 만드는 반면, 포스트먼은 차분한 어조로 다양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읽는 이가 살짝 미소짓게 만든다. 물론 두 저자 모두 매력 만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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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결국 어휘력에서 승부가 나는 듯 싶다. 누가 나에게 "지식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바로 "어휘력입니다"라고 답하겠다. 이어 "지혜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바로 "문장력입니다"라고 답할 듯 싶다. 어휘력과 문장력이 뛰어난 이들이 참으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