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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흥라떼 Jan 14. 2023

엄마, 베트남에 가고 싶어요

첫째의 말

요즘 우리 집 첫째와 둘째는 도서관에서 그림책과 연계한 수업을 듣는다. 첫째는 수요일과 금요일, 둘째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이 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역할분담을 했고 한 명은 수업을 듣는 아이를 도서관에 데려가고 나머지 한 명은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 둘을 돌본다. 내가 직접 배우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들을 도서관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게 사실 굉장히 피로하다.(이제 고작 2주를 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가 이 일을 힘을 내어 지속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째의 수업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자면 프로그램 이름이 '그림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다. 독서를 핵심으로 생각하는 우리 부부에게 이만한 매력을 가진 수업명은 없다. 그림책을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싶은데 이와 더불어 다른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도 배운다니! 7번의 수업을 위해 저렴한 재료비를 냈고 아이는 매 수업시간마다 한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그 나라의 대표적인 소품을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온다.


이틀 전 저녁을 먹으며 아이의 수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업은 만족스러운지, 오늘은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그리고 만든 소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일상적인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데 아이가 대뜸


엄마 나는 베트남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적잖이 놀랐다. 내 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언제나 아이들에게는 우리 부부가 책을 읽다가 나오는 나라를 소개해주고 "거기에는 00가 있어. 다음에 비행기 타고 가서 직접 보자."와 같은 진부한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번에는 달랐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알게 된 베트남은 매우 매력적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일곱 대륙과 3개의 나라에 대해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자는 이야기는 전혀 없던 아이였는데 그중 하나인 베트남에 가자고 말하다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요즘 내 고민이었던 아이의 영어공부에 대한 속내를 교활하게 드러냈다.


엄마가 00이 영어공부 열심히 하면 데려갈게.
우리 여행 가려고 돈 모으고 있잖아.
그걸로 우리 가족 베트남 가면 되지.
대신 거기 가려면 영어를 잘해야 해.
그 나라 사람들 말은 어려우니까 영어로라도 이야기해야 하잖아?


아이는 내 말을 듣더니 이내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랑 아빠가 영어로 이야기해 주면 되잖아요?"


설득 실패. 아니 왜 베트남을 가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말에 속지 않느냐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는 내 핸디캡이다. 영어로 인해 당한 수치를 생각하면 10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가 갈린다. (부들부들) 그래서 이제 3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영어를 잘하고 싶다.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나의 욕심을 이제 갓 (한국나이로) 8살이 된 아이에게 주입하게 된다. 어떻게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이건 아이에 대한 교육적 접근이 아니라 그저 내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아이는 베트남이 여름이 긴 나라, 하루 최고 기온이 40도가 되는 나라, NON(논)이라는 모자를 쓰는 나라라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고 신기했는지 이 이야기를 두세 번이나 했다. 베트남을 가서 그 더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피부로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을 뿐인데 거기다 대고 "영어를 잘해야 해."와 같은 아주 답답하고 꽉 막힌 소리를 해대는 나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부끄러워서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설득을 한답시고 한 내가 참 우습기도 하고.


아이가 영어를 잘해야 하는가?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사실 이건 내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용기 내지 못했던 기회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살면서 내도록 주눅 들었던 마음, 직접 경험한 수치의 경험들은 내가 느낀 것인데 정작 나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내 아이에게는 37년간 살면서 경험으로 얻게 된 결론을 일방적으로 그것도 뜬금없이 주입하려 했던 것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어흥라떼 너나 영어공부를 하렴.' 내 안의 핸디캡을 아이를 통해서가 아닌 내가 극복해야겠다. 아이에게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걸 말해줄 필요가 없다. 아이가 영어를 잘하든 말든 하고 싶든 말든 그건 아이의 선택이기에 내가 결정할 부분이 아니다. 다만 절실하게 내가 영어공부를 해야겠다. 지금까지 놓쳤던 기회는 앞으로 잡을 기회들로 만회하면 그만이다. 사람이 매 순간 어찌 완벽하고 최선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후회와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극복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당장 집에서 잠자고 있는 3-5년마다 (꾸준하게) 한 권씩 사놓은 영어책이나 다시 붙들어야겠다.


베트남은 아이가 영어를 잘하면 가야 할 나라가 아니라 내가 가서 공부한 영어로 실력발휘를 할 나라로 정해야겠다. 네 말이 맞다. 베트남에 여행을 가면 엄마가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해 줄게?


(그런데 엄마의 이런 멋진 모습을 보면 혹시나 네가 또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더 생기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엄마는 도무지 어쩔 수가 없구나....... 휴…)




사진 © renedeand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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