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고 싶다.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한다. 11시 59분이다. 아직 12시 정각까지는 1분의 시간이 있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59초가 있는 건지 아니면 1초만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핸드폰을 확인한 시간이 그 1분의 처음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난 1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1초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만약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안다고 한다면...
그 시간에 맞추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만 하게 된다. 때론 조급함에 그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도 다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뭔가 느긋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것이 너무 느슨해져서 제대로 해 내는 것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관리라는 명목하에서 우리는 1년 후의 나의 모습, 5년 후의 나의 모습, 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나누어 생각하고 계획해야 한다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주저주저하느라 10년을 또 20년을 훌쩍 보내버리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10년 전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시작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어도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나 보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3일마다 계속 작심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하루살이에게는 그 하루가 인생의 전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전부가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모른다. 하루살이처럼 하루가 될 수도 아니면 100년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을 정복하는 게 사람인 것 같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게 우리의 참모습이다.
마치 그 1분의 시간 안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불교에서는 '찰나'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또 '겁'의 시간도 이야기한다.
예전에 누군가를 만나면 해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몇천 겁 동안의 인연이 있다고 불교에서는 이야기한다고 하더라. 지금 우리가 만난 우연은 대단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겁'의 시간이 산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지는 동안의 긴 시간이라고 하니 몇천 겁은 얼마니 긴 시간인 것인가.
그러나, 그 몇천 겁의 시간도 시작은 내가 알지 못하는 1분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1분에 목숨을 걸진 않겠다.
내가 그 1분의 어느 시점에 서 있던, 난 그냥 지금 내 일을 하면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총시간을 알지 못하지만 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평생을 살 것처럼 행동하지도 또 내일 죽을 것처럼 살지도 않을 것이다.
난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