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소중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가 좋은 것일까요?
은행 내 사내 게시판이 있다. 그중 직원들의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게시하는 곳이 있다. 기쁜 소식은 결혼소식이다. 젊은 직원은 본인의 결혼 소식이고 선배들의 자녀들 결혼 소식도 있다. 슬픈 소식은 더 눈여겨보게 된다. 장례가 보통 3일이니 문상을 갈 수 있는 시간은 이틀이고, 혹여나 소식을 놓쳐 친하신 분과 관련된 부고를 지나쳐 버리는 결례를 할 때도 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상이 '호상'이라고도 하지만 이별을 대하는 가족들에겐 '호상'은 없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도 손을 만져 보지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 눈가엔 눈물이 고인다.
얼마 전 아는 형님의 '자녀상'이 슬픈 소식 게시판에 떴다. 어떤 이유로 자녀와 슬픈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 집 큰 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있음을 알았기에 가슴이 멍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직원은 아침에 딸아이를 혼낸 것이 미안하다며 이모티콘이라도 선물해야겠다고 한다.
내가 가진 소중한 걸 잃어버린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 소중한 존재와 나와의 교감이 크면 클수록 그 이별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모님과의 이별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에 그 슬픔이 조금은 상상이 가지만, 자녀와의 이별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그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다. 나도 겪어 보지 않은 일이기에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힘내세요"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무한한 건 없다. 언젠가 누구와도 또 어떤 것과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또 내가 가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에 잃어버리거나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처음부터 소중한 것이 없었다면 잃어버려서 아쉬워하거나 이별해서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소중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라는 삶이 좋은 것일까?
예전에 다니던 성당 수녀님이 해주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천주교에는 '고백성사'라는 게 있다. 자신의 죄를 찾고 뉘우치고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어느 학생이 물어봤다.
"수녀님. 막 잘못을 하면서 살다가 '고백성사'를 보고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면, 평생 나쁘게 살다가 죽을 때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수녀님은 말씀하셨다.
"죄를 사함 받는 것 맞아. 그렇지만, 죄 속에서 평생을 힘들게 산다면 나중에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삶이 얼마나 가여운 것일까?"
개신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항상 믿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방탕하게 살다가 죽기 전에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교리적으로 맞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생각한다면 방탕하게 살면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니 그 또한 가여운 삶일 것이다.
새로운 물건을 산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재미있기도 해서 소중히 여긴다. 어느 한 곳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소중히 다룬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그 물건에도 하나둘씩 흠집이 난다. 이젠 조금씩 싫증이 난다. 어느덧 그 물건은 어느 한 구석에 조용히 홀로 남겨진다.
정말 소중한 건 값비싸거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소중함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나에게 소중한 존재로 만드는 건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