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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케이스의 소명

‘N 잡러’ 시대의 직업의 의미

by 티키타카존


사람들이 자꾸만 쳐다본다.

내 반짝이는 화려한 장식을 맘껏 뽐내본다

오늘따라 블링블링한 내 모습에 으쓱해진다.


‘꽈당’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내 몸에 금이 가고 상처가 났다.

스카치테이프가 내 몸에 감긴다.


며칠 후 다른 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한다.

난 서랍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의 예수님을 태운 당나귀는 주위 사람이 환호함에 우쭐해졌다. 그러나, 그 환호는 당나귀를 향한 건 아니다. 당나귀는 그 장면에서 조연으로 예수님을 도운 것으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 핸드폰 케이스는 아직도 스카치테이프를 감고 있다. 다른 케이스를 구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정이 든 케이스를 버리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고가의 핸드폰을 깨지지 않게 잘 보호해 준 것에 난 고마움을 느낀다.


세상살이에서 모두가 예수님이 그리고 핸드폰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고 소명을 다 하는 것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고 때론 존경심도 표한다. 난 내 핸드폰 케이스에게 박수를 보내고 엄지 척을 해 준다.



며칠 전 SNS에 올린 글이다. 핸드폰 케이스의 역할에 '소명'까지 언급해서 너무 오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 핸드폰 케이스는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비록 잠시 우쭐함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소명(Calling) :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는 것을 이르는 말'


처음 SNS에 글을 올릴 때 제목은 '핸드폰 케이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단어는 정해져 있는 길을 가야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소명은 왠지 부름에 응할지 말지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금은 능동의 개념이 들어 있어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소명으로 바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하기 힘든 시대, 한 가지 직업이 부족하여 자의든 타의든 'N 잡러'가 되어야 하는 시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직업이 구분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세대에 본인의 직업이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서서 소명의 단계까지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고상하지 않은 가 하는 고민도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두 명의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극 중 이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이영희(정은혜)이다. 다운증후군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내 편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정은혜 씨가 그린 케리커쳐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는 화가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농인 역할의 배우 이소별이다. 난 이 배우가 극 중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실제로 이소별은 농인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무용, 현대무용을 배웠고 노희경 작가를 통해 이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게 되었다. 기억해 보니 내가 그녀를 처음 본건 2020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MC를 하던 모습이었다.

드라마에서 영희와 별이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시장에서 삼촌(제주도에선 남녀 불문하고 먼 친척들을 통칭함)들과 함께 생선 염장을 하던 중 영희를 만나는 별이는 자신이 농인임을 이야기한다. 영희는 "그러면 우리는 친구네" 하고 대답한다. 사실 모두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 아픔을 가진 이들이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장면이 찡하게 다가왔다.


정은혜, 이소별씨 에게 '배우'도 하나의 직업이다. '소명'까지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N잡 중 중요한 하나이고, 그 역할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KBS 예능 '요즘 것들이 수상해'에서 미대 출신 8년 차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김예지씨를 보았다. 직장에 적응을 못하고 그만둔 후 10년만 하겠다고 청소 노동자인 어머니 곁에서 시작한 청소일이 벌써 8년 차라고 한다. 청소일을 하면서 메일로 일러스트 일을 접수받아 일러스트 일을 꾸준히 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일러스트 일은 주로 재택근무로 하지만 근무할 때면 출근하듯이 옷을 갈아입고 지정된 장소와 컴퓨터, 태블릿 등으로 일을 한다고 한다. 청소일을 소재로 한 만화 에세이 '저 청소 일하는데요?'를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N 잡러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일을 연결시키는 삶이 인상적이다.



사실 난 한 직장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내 직장과 직업이 '소명'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다른 곳에서의 나보다 직장에서의 나에 더 집중하고 노력해왔다. 만약 업무 관련된 일이 내 개인적인 일이라면 그렇게 까지 꼼꼼하게 집중해서 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정작 나와 관련된 일은 '아웃소싱' 한다. 여행을 갈 때는 '패키지'를 선호하고, 집 인테리어는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는 곳을 찾았다. 기성세대에게 한 가지 직업에 집중해야만 하고 집중하는 삶이 당연한 일인 동시에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성세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일 수도 있다.


N 잡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모든 직업들이 내 ‘소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이 N 잡러 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 '소명'에 직업의 꼬리표를 달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본인의 역할에서도 본캐와 부캐가 섞여 있는 요즘에 직업에 본업과 부업을 구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내가 하는 노동에서 즐거움과 만족감, 성취감을 찾는 것으로도 족하다. 내 밥벌이가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호사도 잠깐이나마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본캐보다 부캐가 더 부각되는 시대에 내 본 직업보다 부업에서 더 행복을 느껴도 좋다. 나름 내가 하는 모든 일과 직업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어쩌면 나의 본캐에 너무 만족해서 느슨하게 인생을 사는 것보다 다른 부캐에서 신선함을 찾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부캐가 본캐가 될 수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소명’ 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핸드폰 케이스의 핸드폰을 돋보이게 하는 일과 보호하는 일, 예수님을 태운 당나귀의 으쓱함으로 예수님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과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일 모두 다 훌륭한 일이다. 본업 외에 배우로 시청자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이소별, 정은혜 씨, 청소 노동자와 일러스트 일 모두를 사랑하는 김예지 씨가 하는 일 모두 훌륭한 일이고 '소명'이다.


"원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생계를 담당한다든지 안정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이라도 가치 있는 노동이란 건 변함없다. 꿈의 카테고리 안에 작은 부분일 뿐 다른 부분 들으로도 꿈은 충분히 채워질 수 있다." [‘저 청소 일하는데요? ‘ 내용 중]


"꿈의 카테고리" 안에서 N잡들은 하나가 된다. 그 꿈의 카테고리가 '소명' 이 될 수 있다.

오늘도 소명의 꿈을 꾸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을 칭찬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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