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3일
안 그래도 순천을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첫 여행 당시 비가 쏟아져 순천만 습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고, 또 국제정원 역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여행이지만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곳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기대될 따름이었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린다고?: SRT와 맛집
올 9월까지 순천은 버스나 KTX를 이용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곳 근처엔 둘 다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행 날짜를 9월 1일로 잡아 놨는데, 기가 막히게 그날부터 SRT 운행이 시작한다는 것이 아닌가. 집 앞 10분 거리에 있는 SRT가 딱 맞춰 개통되다니. 덕분에 적어도 순천 역사에는 기록될 SRT 순천행 첫 기차를 타고 순천을 가게 되는 기막힌 우연이 따랐다.
기차에 내리자마자 짐을 역에 보관하고 순천만습지로 향했다. 일단 택시를 타고 순천만습지 근처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기사님이 정말 맛있는 데를 안다며 ‘대대선창집’에 데려가 줬다. 원래 가려던 곳은 아니었으나 이것 또한 추억이라며 기사님의 추천을 따랐다.
대대선창집은 순천만습지 입구에 즐비한 가게 중 하나는 아니었다. 5분 정도 걸어 내려갔더니 오래된 듯한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누가 봐도 현지인들이 알아서 갈 것 같은 뽐을 내고 있었다.
상차림 역시 그랬다. 찐 고구마, 옥수수, 호박 같은 생(?)것이나 대충 나물과 김치류가 턱턱 올려졌다. 그 와중에도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4분의 1마리 닭백숙이었다. (그런데 맛있었다.) 본 요리인 꼬막무침, 꼬막회, 꼬막전, 코다리조림, 짱뚱어탕 역시 모두 맛있었다. 투박한 차림새만큼 그 본래의 맛들을 내는 요리들이었다.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제정원
대망의 순천만습지. 한번 가봤음에도 습지의 갈대밭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설렜다. 앞에 다다라 널리 펼쳐진 갈대밭을 보니 쨍하게 맑은 하늘과 그만큼 푸르른 갈대밭이 세상을 양분하고 있었다. 이번엔 순천만습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갈대밭밖에 없는 곳이지만 이곳저곳 깊숙이 나무 데크를 걸었다. 그저 그 공간의 모양새가 참 좋았다. 더워서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 그마저도 습지를 걷고 있는 나의 일부분이었다.
습지를 만끽하고 나서 다음 행선지는 순천만 국제정원이었다. 국제정원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국제정원을 보며 감탄하기까지는 입구에 들어서고 딱 열 발자국.
순천만 국제정원의 시그니처인 동산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그 동산을 감싸는 호수, 또 호수 주변으로 잘 닦인 산책로와 스페인스러운(?) 선베드들. 마치 해외로 여행을 온 듯한 이질적임까지 느껴졌다.
국제정원은 국내외 유명 정원 아티스트들을 섭외해, 본인의 국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정원들을 작게 조성해 놓는 일종의 박람회다. 아시아권부터 유럽권, 아메리카권까지 온갖 나라들의 정원이 다 있었다. 부지가 너무 넓어 모든 정원을 보진 못했고, 동산을 기준으로 왼편을 크게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사실상 국제정원의 반만 본건데, 다 봤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국제정원의 진정성은 정말 세밀하게 잘 다듬어진 드넓은 부지에서 나왔다. 그 드넓은 공간에 잔디 하나 모나지 않고, 꽃 한 송이 대충 펴 있는 곳이 없었다. 모든 장소가 단정했고 정갈했으며, 화려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각국의 정원을 모아 발생하는 이질적인 분위기도 관람객들을 충분히 들뜨게 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떠오르는 정원은 가우디의 구엘공원을 본 따 분수와 어우러진 스페인식 정원이다.
풀과 나무, 꽃이 어우러진 곳에는 나비가 빠질 수 없었다. 살면서 나비를 가장 많이 본 날이지 않을까. 꽃과 꽃으로 옮겨가는 나비들의 팔랑거림 역시 즐거운 눈요기였다.
―왁자지껄했던 순천의 첫날 밤: 아랫장 야시장
순천엔 두 개의 장이 있다. 웃장과 아랫장. 저번 여행 땐 웃장에서 국밥을 먹었다. 아랫장이 훨씬 큰 곳이라길래 이번엔 아랫장 야시장을 찾았다. 순천의 아랫장 야시장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열린다.
아니, 근데 여기가 진짜 놀라운 곳이다.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 멀리서부터 이미 쿵짝쿵짝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더니 소규모 지역 축제마냥 넓은 홀에 푸드트럭과 포장마차 테이블이 깔려 있고, 그 앞에선 아마추어들의 공연이 열린다. 이미 자리는 꽤 차 있고, 주민들은 옹기종기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불금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주민들과 한 데 섞여 ‘이런 데도 있구나’하며 흥겨웠다.
―다음날 순천: 송광사
순천 하면 유명한 절이 두 곳이 있다. 선암사와 송광사다. 선암사의 경우 유네스코로 지정된 국내 선사 7개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저번 여행에서는 선암사를 갔는데, 이번엔 송광사를 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송광사가 더 궁금했는데, 고려시대 때 조계종을 창시한 지눌이 키운 절로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곳이다. 교과서에 소개되는 고대 유적지나 유물이 현존한다고 하면 개인적으로 궁금증이 폭발하는 편이다. 송광사도 이런 이유였다.
절까지 닿는 길이 험하진 않지만, 거리가 꽤 된다. 위로 곧게 솟아있는 나무숲과 무척 맑은 계곡을 지나면 도착한다. 우선 송광사는 무척 크다. 경내가 매우 널찍하고 건물들이 많다. 그리고 뭐랄까, 자연미보다는 인위적인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그래서 교육원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조계종 스님들의 대표적 수행 공간이라고도 해서 놀랐다. 진짜 경내가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송광사를 나가는 길에 입구에 있는 박물관을 들어갔다. 사실 더워서 들어간 건데, 안 들어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안 사실인데 송광사는 알고 보니 불교계, 불교사에서는 엄청난 절이었다. 우선 고려 대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國師)를 꾸준히 배출해냈고, 나아가 현재는 한국 불교의 ‘삼보사찰’ 중 하나다. 삼보란 부처(불상), 부처의 가르침, 승가(승려 공동체)를 이르는 말로, 우리나라에선 각각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하나씩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걸맞게 송광사는 뛰어난 승려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한다.
―순천 문화의거리에서 먹는 맥주 ‘순천’
언제나 아쉬운 마지막 날 저녁. 이번엔 순천 문화의 거리로 갔다. 예쁜 전구 덕에 밤거리가 예쁜 이곳도 두 번째 방문이다. 순천 문화의 거리는 밥집, 카페, 술집 등이 소소하게 자리 잡은 곳이다.
문화의 거리 초입에 내려 일직선으로 길을 걷다 보면, 왼편에 눈을 사로잡는 파란빛 조명이 새어 나오는 가게를 볼 수 있다. 그 빛에 이끌려 문을 열었고, 그곳은 좋은 음악과 아늑한 분위기의 펍이었다. 마지막 밤을 보내기에 완벽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순천’ 맥주를 먹게 되는데, 어쩜, 맥주도 너무 내 취향이었다. 라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순천’만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라거가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국내산 라거 기준 잘 못 먹어본 수준의 라거의 맛이다. 새로운 여행지에서 새로운 술을 알아가게 됐다.
이건 여담인데, 순천역에서 이 맥주 세 병을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봉투가 찢어져 맥주 한 병이 깨졌다. 무려 종착역 플랫폼에서, 막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나머지 두 병은 집에서 맛있게 먹었다.
―순천: 순한 하늘, 그리고 사람들
우리가 여행간 이틀 내내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다행히 우산을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다. 여행 시작부터 비 걱정을 잔뜩 하고 있었는데, 첫날 택시 기사님이 껄껄 웃으며 “순천은 비 안 내려요.” 이러더라. 순천(順天)의 뜻이 ‘순한 하늘’이라며, 기상예보에 비 소식이 있어도 비도 잘 안 내리고, 기상재해도 잘 없다고 한다.
순천은 사람들에게도 순함을 많이 느꼈다. 택시기사님들도, 국제정원을 위해 힘쓴 주민들도 그렇고, 아랫장에서 지인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던 주민들도 그렇고, 모두 긍정적이고 여유로웠다.
이번 여행편이 유독 긴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다. 그만큼 쓰고 싶은 말,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많은 국내 여행지를 다녀 본 사람으로서 짧은 일정으로도 그 도시가 마음에 들어차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순천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두 번 여행 모두 행복했고, 과하지 않았으며, 불편함이 없었고, 정겨웠고, 볼거리와 할거리가 많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