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힘과 힘, 폭력의 순환

by 티끌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암살자들의 도시>의 배경은 멕시코다. 실제 멕시코를 가보지는 않았으나, 황량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영화 속에서 서늘하게 그려진다.


최근 기사를 하나 봤다. (경향신문 181010 ‘전쟁보다 더 많은 피살자, 삶 자체가 전쟁인 중남미’) 기사에서 보여주는 남미의 현실이, 영화에서 그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힘과 힘,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의 고리’

영화는 더 큰 힘이 어떻게 약한 것을 굴복시키는 장면의 힘으로 진행된다. 국가의 공권력이 무너진 멕시코가 범죄 카르텔에 지배되고 그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이란 더 큰 힘이 개입한다. 범죄 카르텔을 소탕을 위해 미국이 멕시코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멕시코는 이를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유난히 미국의 작전이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이 뜻하는 바대로 계획이 진행된다. 보통 영화 속 작전을 수행하는 집단은 한 번 쯤 위기상황을 겪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반면 미국에 짓밟히는 멕시코의 카르텔은 손쓸 도리도 없이 미국에 휘둘린다. 범죄 집단이라는데 이길 도리가 없다. 질서 있는 압도적인 힘에 무질서한 폭력은 언제나 질 수 밖에 없다. 즉,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로 범죄집단은 소탕된다.


폭력이 폭력을 이긴 결과고, 더 큰 힘이 약한 것을 잡아먹은 결과다. 미국이 작전을 성공했다고 해서,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을까? 어떤 폭력도 폭력의 순환을 막을 수 없다. 더 큰 생채기를 남기고, 고리는 무자비하게 중첩되며 훨씬 단단해진다.


■ 폭력과 멕시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멕시코란 공간이 중요하다. 일상이 폭력에 노출돼 있는 도시로 멕시코가 그려진다. 범죄 카르텔이 경찰이란 공권력과 손을 잡고 총소리가 즐비한 곳이다.


위 기사를 읽으면 중남미는 산업기반이 약해 일자리가 부족하고, 경제난과 빈부격차가 높다. 열악한 교육제도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교육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브라질의 25세 이상 성인 중 고교 졸업자는 27%에 불과하고, 다수는 마약 공급의 범죄 카르텔에서 총과 피를 손에 묻히며 살아간다.


멕시코 내에서 폭력은 순환의 고리를 가진다. 아이들의 모습과 총이란 상징이 자주 병치된다. 총소리를 일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 뽀얀 먼지가 휘날리는 맨 바닥에서 축구를 하다가 총소리가 들려도, 건조한 반응으로 일관한다. 총소리쯤으로 아이들의 축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일상에서 폭력에 노출돼 있다.


기사를 보면 콜롬비아는 세계 최대의 코카인 산지고, 멕시코는 세계 최대의 헤로인 산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계 최대의 마약 소비국은 어딘가? 바로 미국이다.


대사에서 이런 내용의 말이 나온다. “무질서를 없앨 수 없다면, 최소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녀석이 힘을 잡아야 한다” (대사 그대로는 아니다)


마약 소비국으로서 미국이 자국의 마약 소비를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카르텔에 마약 공급책을 쥐어주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범죄집단을 소탕하거나,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정의의 관점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않는다.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는 그런 순진한 목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삭막하고, 비참한 세상 정도는 이상하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와 폭력에 희생되는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혹은 두 양상이 한명에게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이런 역할을 맡는다. FBI의 일원으로 아동 납치를 전담하는 어느 정도 폭력이란 감각과 함께 살고 있는 여성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최종 포식자의 역할이면서도, 차마 그 안에 녹아들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예상치 못한 작전 투입과 생경한 환경 등을 통해 영화는 시종일관 케이트를 제3자의 자리에 두며 진행된다. 마치 비상식 속에 유일한 상식적인 기준을 가진 인물처럼 보인달까.


그리고 최종 포식자의 역할로 폭력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다. 알레한드로는 폭력의 순환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부인과 자식이 (매우) 처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복수를 꿈꾼다.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복수를 달성해줄 수 있는 미국이란 더 큰 힘에 붙는다.


알레한드로가 작전 중에 죽인 경찰의 자식은 그렇게 다시금 폭력에 노출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어린 아이가 후에 총을 손에 쥐고. 범죄조직에 발을 디딜 가능성이 어떨까?


케이트에게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케이트에게 행한 위압적인 태도는 그녀를 다시금 폭력의 순환고리에 빠뜨린다. 마지막에 그녀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지만, 사실 그 강제력과 힘은 그녀 안에 고스란히 내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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