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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Sep 13. 2020

어쩌면 그 길을 걸었을까-1

한슬 에미야, 오늘은 어디 나가냐?

아니, 오늘은 아무 스케줄 없어. 아빠 왜? 어디 가고 싶어요?

아니다. 그냥 물어봤어.

아빠, 우리 밥 먹으러 나갈까? 한슬이가 꼬꼬 먹고 싶다는데, 닭백숙 어때요?

백숙은 뭐, 그놈 자식은 뭔 그렇게 백숙이 먹고 싶다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빠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네 살짜리 한슬이가 좋아하는 꼬꼬가 설마 하니 닭백숙일라고. 닭백숙을 먹고 나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나의 꼬드김에 넘어간 거지. 누룽지 닭백숙은 아빠가 그나마 소화를 잘 시키는 음식이다. 작년에 위암 수술을 한 후로 무르고 담백한 음식을 드시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일을 하면서 아빠에게 맞는 음식을 차려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는 언니네 식당에 곰탕과 누룽지를 대놓고 가져다 먹고는 있다. 언니도 신경써서 이것저것 밑반찬을 같이 챙겨준다. 원체 입이 까탈스러웠던 아빠가 사위 눈 밖에 날까 봐, 물릴 만도 한데 그걸 묵묵히 받아먹는 것도 딴에는 맘이 울적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강의도 없고 미팅도 없다. 대표님에게 집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해놓았다. 제안서를 두 개를 완성해서 회사에 보내주면 된다. 어린이집에서 한슬이를 데려오기 전에 만들어 놓았으니 좀 있다가 메일로 보내주면 된다. 내일이 주말이라 오늘이나 내일쯤 아빠를 모시고 어딘가 근교에라도 다녀올까 하던 중이었는데... 아빠가 먼저 운을 떼니 일이 한결 쉬워졌다. 내가 나가자고 먼저 말했으면 아마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집쟁이 노인네 같으니...


한슬이 할아버지 옆에 타자.

아니야, 엄마가 옆에.

왜 또? 엄마는 운전해야지.

할아버지 운전해. 할아버지 택시 사장님이었는데.

사장님은 사장님 자리에 앉는 거라니까. 그리고 이 차는 엄마만 운전할 수 있어.

이잉, 엄마가 옆에에.

어허! 엄마 맴매한다.


아이의 고집에 아빠는 어쩔 줄 모르고 옆에 서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시트를 떼어다가 조수석에 얹어놓았다. 으이구, 이 꼬맹이 상전... 그나마 네 살짜리가 닭백숙을 먹는다고 해준 것만으로도 오늘은 모든 응석을 받아줘야 한다. 안 그랬으면 아빠는 또 외손주가 먹고 싶다는 것에 덜컥 메뉴를 양보하고 밤에 몰래 소화제를 꺼내 먹었을 것이다.     


졸지에 뒷좌석에 혼자 앉은 아빠는 앞좌석 카시트에서 통통한 다리를 달랑거리며 시끄럽게 영어 노래를 불러대는 한슬이를, 입을 앙다물고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저 표정을 안다. 내가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거나, 아빠가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날이면 꼭 저렇게 입을 앙다물고 눈가에 주름이 가득한 채로 웃으며 내 이마를 쥐어박곤 했다.


으이그, 이 개놈 시키     


쥐어박힐 때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덤빌 듯이 아빠의 손을 뿌리치는 동생과 달리, 나는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호’ 해달라고 아빠에게 머리를 들이대곤 했다. “말 만한 지집애가 비위도 좋다니까...” 엄마와 동생은 일부러 문을 쾅 닫고 옆방으로 들어가서 둘이 두런두런 밀담이 깊었다. 엄마는 아빠를 끔찍하게 싫어했고 나와 동생은 언제부턴가 한 명은 아빠의 편, 한 명은 엄마의 편이 되어버렸다. 둘이 똘똘 뭉칠수록 나는 아빠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하지 않는 나와 달리 아빠는 얼굴에서 힘이 빠지고 어깨가 처졌다. 여전히 입을 앙다물고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슬퍼보였다.


아빠, 아빠는 나랑 살아. 엄마 말고. 내가 좀 철이 없고 음식도 아마 못하겠지만.

이 멍청이... 아빠는 무식해서 아무 짝에도 못 써먹어. 니나 잘 살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써먹을게. 알았지?     


고등학교 때부터 늘상 농담처럼 그렇게 말은 해놓고 정작 아빠를 모시고 온 건 위암 진단을 받고 난 후였다. 남들 다 갖고 있다는 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고,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진짜 죽을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느닷없이 밤에 전화를 걸어서 아빠는 울었다.


한슬이 한 번 보고 죽을란다.

무슨 일이야, 어? 지금 몇 시지... 아빠 왜 그래?

술 마셨다! 내가 새끼덜 갈친다고 십오 년을 택시 험시로 맥주 한 잔도 입에 안 댔는디이...

알지, 내가 아빠 그랬던 거 알지. 근데 왜, 오늘은 무슨 일로 마신 건데, 응?

아빠 죽는단다. 암이라고 암. 어어어어...


아빠는 혀가 꼬인 채로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열댓 번을 전화했으나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가 나올 뿐이었다. 사람이 미칠 노릇이었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서 집에 가봐야 한다고 하고, 자고 있는 한슬이를 안아다가 카시트에 태워서 밤길을 운전해 친정으로 갔다. 운전해서 집에 내려가는 동안 남편에게 아빠를 모셔올 거라고 얘기했다.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아빠가 우리 집에 오시면 방 하나를 내드려야 하는데, 그 방은 남편의 오디오방이었다. 모든 어지러운 것들을 잠재울 수 있는 자유로운 방, 그 공간이 가족보다 소중한 남자다. 나는 시선을 거뒀다.


방금 그 한숨은 안 들은 걸로 해줄게. 우리 아빠야.

...

근데 이번 한 번이야. 내가 너네 부모 일에 한숨 쉰 적 있어?

---

나한테 진심 같은 거, 들키지 말라고.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아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겄지. 아 알아서 들어오겄지 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사람이 싫어도 그렇지, 암이라는데, 울고 불고 난리 났던데 어떻게 이렇게들 태평해?

언니 너는 그걸 믿냐? 니가 뭘 알아? 걸핏하면 죽는다고 가출하는 인간이야. 밤에 안 들어오는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암은 무슨, 이제 지쳤다고. 그 챙피한 꼴을 니가 한 번이라도 당해봤어? 엄마 속이 다 시커멓게 탔다, 탔어.


엄마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러운 울음을 토했다. 새끼를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며, 어떻게 에미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고, 서방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이 어디 있겠냐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기가 막힌 타이밍, 척척 맞는 앙상블이다. 아빠는 그렇게 본척만척하면서 아빠가 벌어다 준 돈으로 대학 다니고, 푼돈 한 번 벌어본 적 없이 무슨 ‘딸기 아가씨 선발대회’니 뭐니 하는 지역 미인 대회나 기웃거리며 노는 주제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빠 옷만 주섬주섬 챙겼다. 부아가 났다. 그냥 도로 놓고 방을 나왔다.


다 새로 살 거야. 저까짓 잠바때기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어. 빚을 내서라도 다 사줄 거야.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 아니었어? 차라리 그때 이혼을 하지... 이제 아빠 돈도 못 벌어. 쓸모도 없을 테니까 내가 아빠 데리고 갈게. 수술도 시켜야 하고. 돈이 많이 들겠네. 설마 아빠 먹여살릴 생각은 아니지? 그러니까 둘이 알아서 살아. 내 등에 빨대 꽂을 수 있는 건 아빠 뿐이야.

저런 독한 년,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년!

응, 그 말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새롭네. 또 듣고 싶진 않지만. 잘 있어.


이번에는 내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아니, 십 년이 넘도록 마음 속으로만 수천 번 외쳤던 말을 드디어 해버렸다. 숨도 쉬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다시는 오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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