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완주 Sep 03. 2020

함께는 외롭고, 혼자는 풍요롭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돼지 정권의 나팔수, 양들이 나온다. 독재 돼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양들은 소위 '어용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른다. 제목, 가사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작사, 작곡, 아티스트는 돼지 나폴레옹이고, 양은 그냥 피처링이다.


독립한 후 줄곧 혼자 살다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었을 때 아마도 나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함께는 좋고, 혼자는 나쁘다."라고 말이다. 대학 4학년 때 2인 1실을 함께 쓰던 기숙사 룸메이트는 무척 성격이 좋은 아이였다. 누가 봐도 "집에서 가정교육 잘 받은 티가 난다."라고 하는 온순하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 그래서였는지 모나고 거친 나를 잘 이해해주었다. 의외로 죽이 잘 맞았던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 깨워주고, 공부를 방해하지 않고,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가 쓰던 방은 기숙사에서 가장 깨끗한 방들 중 하나였다. 사감 선생님도 인정할 정도로 늘 정리가 잘 돼있었다. 룸메이트는 방을, 나는 욕실을 맡았다. 특별히 청소하는 날 같은 걸 만들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청소 문제로 불편을 줘본 적이 없었다. 각자의 침대도 흐트러짐 없이 항상 가지런했다. 정돈된 환경은 안정을 뜻한다. 결혼 후에 타인과 함께 사는 삶에서 위생관념과 기준의 차이가 갈등의 복병임을 겪어보고 나니, 4학년 그 시절의 친구는 정말 완벽한 룸메이트였다.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고 1인 1실의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밤마다 뭔지 모를 허전함에 오도카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맥주를 한 캔 마셔야 잠에 들곤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친구의 빈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함께라는 건 이런 거구나...' 학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집을 그리워하거나, 집에 가고 싶어 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는 내가 매우 독립적이고 외로움을 안 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내가 외로움을 안 타는 게 아니라, 외로움이 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결혼은, 함께라서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했었고, 사실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나자, 나는 함께 있을수록 더 사무치게 혼자 남겨지는 경지에 다다랐다. 기숙사 룸메와 나는 서로 "너 왜 네 할 일을 안 해서 나를 불편하게 하니?"라는 류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 남편과 나는 늘 그 기싸움이었다. 왜 애를 안 보니, 왜 나만 일해야 되니, 말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하니, 지금 이 난리통에 잠이 오니,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니, 나더러 그 일을 하라는 거니, 그걸 왜 말도 없이 혼자 정하니...


혼자가 되고 나서 기대할 대상이 없어진 후에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지게 되자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모든 악한 것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내가 노력한 만큼 상대방이 부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나 혼자 희생한다고 느낄 때 지치고 화가 난다. 분명 함께 있고 같은 길을 간다고 믿었는데, 정작은 내 환상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그런 불안한 공생을 해오며 기대-낙심-분노로 이어지던 악순환의 쳇바퀴가 사라지자, 그 쳇바퀴를 돌던 에너지는 내 나름대로는 좀 더 쓸데 있는 일에 쏟을 수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없어. 이제 당신이 뭘 하든 안 하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권력을 맛본 나폴레옹이 인간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양의 노래가 "네 발은 좋지만, 두 발은 더 좋다."로 히까닥 바뀌어버렸듯, 결혼의 환상에서 현타가 온 나의 노래도 바뀌고 말았다. "함께는 외롭고, 혼자는 풍요롭다." 다시 되돌아온 혼자는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외로움을 모르고 살았던 때도 있었고, 알면서도 혼자라서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함께 있지만 외로운 시간도 겪었다. 셋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마지막 것이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혼자인 삶은 외로움이 아닌 정신적 풍요와 안정이다. 어쩌면 지금의 '외롭지 않은 혼자'를 얻기 위해 긴 시간을 거친 것인지 모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출처: 석가모니의 수타니파타)


둘이었을 때 '외롭지 않은 혼자'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아마 나는 그럴 만한 재목이 못 됐을 것이다. 이 모습으로라도 무소의 뿔처럼 살면 될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존귀한 존재라고 강요하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