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왜 너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니?"라는 물음들과, "무엇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넌 정말 존귀한 사람이야."라는 말들에 대해 굳이 꺼내놓지 않았던 솔직한 나의 대답이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이별은 여덟 살의 겨울에 있었다. 여덟 살에서 아홉 살로 넘어가는, 2학년에서 3학년이 되던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왔고 햇빛에 반짝이는 눈밭을 보기만 해도 마음에 설레던 때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많지 않다. 1학년 때의 일들도 아주 어렴풋하다. 파편 같은 짤막한 장면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덟 살이면 인상적인 사건들은 얼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다. 이별은 하필 그 나이에 찾아왔다.
그 겨울방학 때 엄마는 넷째를 낳았다. 두 살 터울인 세 딸 밑으로 다시 두 살 터울의 아이가 생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도 우리 집은, 딸만 있어서 더 가난해 보였다. 그들에게 아들은 곧 복이고 미래였다. 딸만 셋이라서 박복했던 엄마가 넷째를 임신한 내내 주변 사람들이 '이번에는 아들일 것'이라는 복된 확신과 희망을 주었었다. 배 모양을 보니 어떻고 저떻고 하는.
어느 날 깊은 잠 속에서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둠 속에서 아빠가 말했다. "애기가 나오려고 해서 아빠가 엄마랑 병원에 가니까 동생들 데리고 집 잘 보고 있어라." 놀라서 잠이 달아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는 그만 방에서 아이를 낳아버렸다. 아빠가 황급히 이불로 나를 뒤집어씌웠다. "아빠가 말할 때까지 가만있그라." 비명 한 번 없이 아기를 낳고 난 엄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여?"
"... 딸이여."
"아이고 어쩌까..."
희망과 기대가 평생의 짐으로 바뀌는 엄마와 아빠의 대화는, 나의 심장소리와 함께, 삼키는 한숨과 울음과 함께 하얀 눈밭을 거칠게 짓밟은 발자국처럼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다. 아빠가 가위를 찾는 소리가 들렸고, 대야를 가지고 오는 소리가 들렸고, 철벅이며 방바닥을 닦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기가 울지 않은 날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매일, 쉬지 않고 울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우울하게 세 딸과 또 태어난 딸의 뒤치다꺼리를 했고 아빠는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우는 아기를 엄마 대신 천기저귀로 업고 방안을 흔들흔들 걸어 다녔다. 그러면 조금 눈을 붙이고 금세 깨서 또 울었다. 도통 먹지도 않았다. 안 먹고 안 자는 아기를 돌보는 건 원래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원치 않는 넷째 딸이 보채는 걸 감당하는 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인가 엄마가 울면서 동생을 밀쳐내고, 아빠가 엄마를 다독이는 걸 보았다.
뭔가 심상찮다고 느꼈는지, 엄마는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도 몇 번 따라갔다가 다리가 아파서 찡얼댔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이내 혼자 다니기 시작했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기는 여전히 파랗게 울어댔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기를 업어서 재우는 것이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다른 아기가 어떤지 알지 못했으니 아무리 울어도 그러려니 했고, 허리를 조금 굽히고 무릎을 까딱까딱 서성이며 노래를 불러줄 때 아기가 내 등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를 업어 재웠다.
어느 날 밤에 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원래 친척도 친구도 왕래가 없는데, 할머니가 문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이 몹시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 후에 더 낯선 남자가 왔다. 그 남자는 집 여기저기에 소금을 뿌리고 종이에 글씨를 써서 태워 날렸다. 할머니는 허공을 향해 손을 비비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일이 왜 우리 집에서 행해졌는지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세상을 이해하기엔 충분치 않은 나이였던가보다.
얼마 후 엄마가 또 아기를 업고 병원에 갔다가 몇 시간 지나서 집에 돌아왔다. 들어오는 엄마의 표정은, 충분치 않은 나이에 보았음에도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었다. 엄마가 포대기를 풀고 아기를 이불에 눕혔다. 아기도 이상했다. 울지 않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어딘가를 달리듯이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아기의 손을 잡았다. 곧 아빠가 일하다 말고 집에 왔다.
"심장에 구멍이 있답디다..."
엄마도 아빠도 아기를 보지 않았다. 멀찍이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앉아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면서. 나는 잡고 있던 아기의 손을 놓았다. 아기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기의 숨소리가 멎자 엄마는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애가 죽어부렀네..."
나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가지 못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울지 않는 아기를 볼까 말까 망설이며 오래 멀뚱히 혼자 앉아있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나에게 죽음은 낯설고도 어색했다. 다시 아기의 손을 잡아보았다. 여전히 보드랍고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내 등에 머리를 기대고 지친 잠을 자던 아기의 마지막 체온이었다.
고모부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빠 등을 툭툭 치더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라는 류의 위로인지 뭔지를 했던 것 같다. 아기는 여전히 외출할 때 입었던 우주복을 입고 누워있었다. 고모부가 아기의 머리를 들자 몸이 그대로 들렸다. 고모부는 가위로 우주복을 잘라 벗기고 하얀 천으로 아기를 돌돌 말더니 가지고 온 라면박스 안에 넣었다. 그리고 빨간 노끈으로 박스를 묶어서 가지고 나갔다.
"좋은 데다가 묻어주소."
엄마 아빠는 둘 다 고모부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내가 뒤늦게 나갔을 때는 고모부의 하얀 트럭이 저만치 출발한 후였다. 아기를 넣은 라면박스가 짐칸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태어난 지 두어 달 만에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진 그 아기를 나는 '지현'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더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카(Carr)가 말했다. 개인의 경험과 역사도 그렇다. 과거의 사건은 여덟 살의 겨울에 종결되고 고정되었는데, 그 후로 나에게 두고두고 반복해서 새롭게 말을 걸었다.
몇 년 뒤 TV에서는 대통령의 부인이 주도하던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수술'사업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심장에 구멍이 났다던 TV 속 아기들이 수천만 원의 수술비를 지원받았고, 파랗던 입술이 핏빛을 되찾았다. 심장에 구멍이 난 아기들이 저렇게나 많구나 싶었다. 과거의 사건이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 아기도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었잖아. 근데 왜 하필 그날 죽었던 걸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마 알 걸. 잘 생각해봐."
유난히 축 처진 채 집에 오자마자 죽은 아기는, 안 그래도 늘 물음표로 남아있었다. 하필 죽을 때가 몇 시간 안 남아서야 원인을 알았다는 건 우연치고도 이상한 일인 거다. 아무에게도 묻지 못할 질문이었다.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대답을 들었다한들 곧이 믿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물음표는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며, 질문과 답 모두 어둡고도 사악한 것이다. 그리고 미완의 드라마처럼 오랫동안 사람을 태운다.
'소중하지 않은' 나를 만든 것은 8할이 그 질문이었다. 딸이라서, 살리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엄마가 의사를 통해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내 안에 거의 신앙과도 같은 확신이 되었다. 터무니없는 억측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때 하필 여덟 살이었던 거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제대로 사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눈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진 아이였다. 나는 어지러이 눈밭을 헤매며 내 맘대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프면 버려질 수 있고 돈이 많이 들면 버려질 수 있고 딸이라서 버려질 수 있고 내 죽음은 태어남 만큼이나 산 자들의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역사의 교훈이자 종교와도 같은 확신이었다. 그 교리에 충실하게 사십 년을 살게 되리라고는 나도 알지 못했다.
사십 년간 나의 부모님도 충실하게 그 교리대로 살고 죽었다. 아버지는 가족이 쓸 돈을 위해 평생을 살았고 민폐가 쓸모를 넘어서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엄마는 내가 소중해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준 게 아니다. 손해를 감수하며 오랫동안 투자했을 뿐이다. 엄마에게 나는 가성비가 높아야 했다. 내가 취업하자마자 급여통장을 엄마 이름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시작으로 무리한 대출과 보증을 강요하고, 돈뿐 아니라 모든 것을 내놓으라 했다. 집에 내려가면 입고 갔던 티셔츠와 면바지를 동생에게 벗어 주고 가라고 할 정도였다. 내가 가수 장윤정이 아니라는 것만 다를 뿐, 그가 자기 엄마로부터 들은 말들은 내가 내 엄마에게서 들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제 정말 돈이 없다고 하면 남자랑 살림 차렸냐는 막말을 엄마에게서 들어야 하는, 나는 결코 존귀하지 않은 존재였다.
조금 늦게 겪었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일찍 겪었더라면. 늦게는 잘 모르겠지만 빨리 겪었더라면 그냥 쉬 잊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지금의 삶이 조금 달라졌을까? 인생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고,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는데, 돌아보면 그 사건은 참 절묘한 타이밍에 걸쳐 있었다. 원망은 없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서는 전향적인 사고, 정신승리가 필요하다.
나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내 본질을 받아들였고, 그 본질에 충실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불편하거나 슬프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내가 얼마를 더 벌 수 있는지, 죽으면 보험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며 살 것이다. 물건을 소장하거나 뭔가를 기념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쓸모가 없으면 무조건 버릴 것이다. 조용히 살다가 흔적 없이 죽을 것이다.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진대, 사람들은 굳이 생일이 없다는 나를, 기꺼이 가장 작은 몫과 가장 큰 짐을 먼저 집어 드는 나를, 구석에 앉는 나를, 얼굴에 검버섯을 내버려 두는 나를 불편해한다. 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안쓰러워하고 심지어 괴로워한다.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귀하다'라는 명제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만큼이나 명백한 진리인 세상이다. '나에게 선물하기'도 많이 하고 '자존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 해도 괜찮아'라는 자기 위로나 탕진잼이라는 자기만족적 소비도 넘쳐나는 세상이다. 가성비와 쓸모의 세상에 사는 나는 이런 사조가 유행하는 세상에 늘 이방인이다. 자존감에 집착하지도, 나에게 선물한다는 자기 분열적 마케팅에 넘어가지도 않는다. 욕구 자체가 없다.
존재만으로 소중한 이들의 존귀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지지한다. 내 자식들도 그런 사람으로 키우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설령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고 산다고 해도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걸 노력해서 알게 될 것도 아니다. 굳이 탐내지 않고 이대로 살아도 된다. 그러니 내게 '존귀하다'는 그들만의 단어를 전도하고 설득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마치 그걸 믿지 않는 것이 신성모독인 것처럼 말이다. 진짜 생일도 아닌 주민번호를 뒤져서 강제로 그날 나를 생일 케이크 앞에 세우지도 말았으면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감격해서 울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놈의 감격이 도통 되질 않는다.
*제목 사진 : 영화 가타카(1997)에서 주드 로(제롬)가 쓸모를 다한 후 스스로 소각로에 들어갈 때 목에 걸었던 자신의 메달.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출처 : https://blog.naver.com/kakkthexx/221458434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