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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Jul 20. 2020

그리운, 우리 아버지

대학에 갔을 때 나는 여러 가지에 놀랐다. 동기들이 내가 상상해본 범위를 넘어서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아서 놀란 것이 첫 번째이고, 해태 타이거즈가 아닌 다른 야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촌동네 출신이라 그렇다. 이해 바란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아프게 놀랐던 것은 동기들이 말하는 '아버지'들이었다.


"우리 아빠는 영어 발음이 너무 웃겨. 어릴 때는 아빠 발음이 너무 창피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영국식 발음이었지 뭐야."

"아 그거? 아빠가 외국에 출장 갈 때마다 사서 모으는 거야. 돈도 안 되는 걸 많이도 사와. 엄마가 엄청 싫어해."

"나는 진짜 아빠처럼 권위적인 사람이 싫었어. 가족끼리 회의를 할 때도 자기주장이 제일 옳아. 아니, 회사에서나 사장이지 집에서도 사장이려고 하면 어떡해? 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아빠가 영어를 해? 아빠가 사장이야? 외국에 출장? 몹시도 일상적인 그네들의 가족 이야기가 내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대화는 아무런 악의 없이 나를 소외시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아무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타학교 학생들과 함께 활동하는 연합서클에 있었는데, 1학년 때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멋모르고 나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느그 아부지는 뭐 하시노?" 지방에서 유지쯤 되는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우리 아빠? 택시 기사." 했고, 대화가 멈췄다. 나는 멍한 그 녀석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아주 어릴 때 명절마다 갔던 친가는 산속에 있었다. 시내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포장도 되지 않은 신작로를 수십 분 가다가 어느 산 언저리에 내려서 한참 산길을 올라가면 집이 딱 한 채 나왔고, 그게 아버지가 태어난 집이었다. 엄마는 그 집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작은 방 하나에서 누에를 키웠는데, 시집을 오자마자 누에를 맨손으로 고르라고 했다며 말할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일곱 살 무렵 친가는 개량 한옥이 새로 들어선 마을로 이사를 내려왔다.


아버지는 그 집의 둘째였고, 위로 형이 한 분, 밑으로 다섯 동생이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술에 빠져 살았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고, 십 대 초반부터 일을 했다. 그게 아버지의 최종학력이다.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한 아버지의 일상은 평생토록 매일같이 새벽에 시작되었다. 구두를 닦고, 거리의 쓰레기를 쓸고, 중동에 갔고, 배를 탔다. 두부공장 배달을 하고, 다시 배를 타고, 목욕탕에서 다시 구두를 닦고, 통근버스 운전을 하고, 마지막에는 시골에서 택시를 했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아버지가 모은 돈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의 술값과 형의 집 마련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평생 빚에 허덕였다. 


그 와중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양가 집안을 모두 합쳐서 공부로 4년제 대학을 들어가기는 우리 서열이 최초였고, 순번으로는 세 번째였다. 당시 아버지는 시골에서 지입택시 기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아버지는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에도 못 갔다고 했다. 시골은 대개 콜택시다. 택시 기사 세 분이 순번대로 전화를 받는데, 행여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장거리 손님을 놓칠까 봐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그렇게 4년을 버티더니 내가 마지막 학기를 마치자마자 병이 났다. 집에 내려가 보니 아버지는 몇 주째인지 두꺼운 겨울 요가 흠뻑 젖을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중에 그 요는 곰팡이가 슬어서 버려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참석하지 못하는 졸업식을 차마 가지 못했다. 사실 화장도 잘 못하고 입을 만한 옷도 없었다. 과사무실에 가서 입지도 않은 가운 세탁비를 강제로 내고 졸업장만 받아왔다. 학사모를 씌워서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는데, 결국은 하지 못했다.


나의 대학 졸업은 어쩌면 아버지로선 자신의 서러운 인생에 대한 한판 뒤집기였을지 모른다. 시골에서조차 땅 한 뙈기 없이 남의 집을 빌려 산다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택시 기사인 아버지는, 멀쩡히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딸이 유일한 자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 대학 4년은 고통이었다. 유난히 부유한 학교에서 나의 가난은 너무 도드라졌다. 학교 친구들이랑 함께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점심 한 끼를 같이 먹으면 며칠 용돈을 아껴야 했다. 우리 학교는 구내식당도 비쌌고, 주변 식당도 비쌌다. 시골 출신인 나는 과외 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가도 혹시라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어찌할 바를 잘 몰랐다.


아버지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지도 않았다. 그게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남들처럼 아버지를 시시하게 깔 수가 없었다. "아, 우리 아빠? 완전 꼰대야~" 이럴 수가 없었다. 내게 아버지는 한없이 무겁고 가엾은 분이었다. 친구들 중에 아무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행여 내 아버지를 무시할까 봐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한없이 불쌍한 분이다. 아버지가 연민의 대상인 것이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나는 그 아버지가 참 감사하고 좋았다.


학교 친구 두세 명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아 먼 길을 와주었다. 고마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집에서 자랐는지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의 측은한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내가 왜 미안한지 알 수가 없으나 미안했다. 친구들에게, 아버지에게.


마음을 정리하려고 쓰고 있는데 정리가 안 된다. 그냥... 정리하지 않고 올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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