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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Oct 04. 2020

용서해요, 용서하세요.

"자매님, 이제 그만 용서하세요."

"글쎄요, 그게 제가 용서할 일인가요?"

"다 자매님을 위해서예요. 마음에 쓴 뿌리를 계속 갖고 있는 것도 죄랍니다."

"그건 좀 억울하네요."

"용서하시고, 이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세요."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집사님들이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처방은 늘 뭐 이런 식이다. 삐딱한 나로선, 그럼 내가 이렇게 지지리도 박복하게 살면서 자꾸만 실패하는 것이 용서하지 못하는 내 죄 때문이라는 건가? 그것도 다 내 잘못인 거야? 요렇게 된다.


남편을 만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초심자에 불과한 내게 주어진 그 신앙적인 과제는 나를 몹시 불편하고 괴롭게 했다. 백 번을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데 나더러 용서하라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 사람들은 내게 잘못했다는 생각도 안 할 텐데. 그게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면, 난 아마 지옥에 갈 운명인가부지 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고 너무 함부로 말한다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그 해 초에 나는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변두리 마을에 있었다. 두 달에 걸친 선교여행 중이었다. 어느 날 한 고등학교에서 사역을 마치고 차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뛰쳐나가는 것을 선생님이 붙들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아이가 자살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는 몹시 불안해 보였고, 사람을 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우리를 이끌던 선교사님이 아이에게 성경구절을 보여주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I will not die but live... 시편 118:17)' 아이는 그 구절 안에 들어있는 'live'라는 단어를 읽지도 못했다. 몇 번을 다독이며 읽어보라고 했으나 번번이 그 단어를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 학생을 붙들고 온 마음을 다해서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자살자의 유가족이라고, 너의 고통이 큰 것을 안다고, 제발 살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선교여행 내내 자살과 관련된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자리에서 뭔지 모르는 죄책감에 늘 비켜나 있었었다. 그러던 내가 왜 그날은 그렇게 간절했는지 알 수 없었다.


베이스에 도착하자 팀 리더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자매님, 오후에 아이들을 제게 맡기시고 기도실에 계시는 게 좋겠어요."

"왜요?"

"어쩐지... 오늘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조금 짜증이 났지만, 나는 리더가 시키는 대로 아이들을 보내고 곧장 베이스의 작은 기도실에 들어갔다. 또 뭐 용서하라는 거겠지. 아이들을 봐준다니까 모처럼 혼자서 좀 쉬다가 가야겠다 생각했다. 기도를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날도 그냥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는 시기는 지나갔지만, 나는 그 사건 이후로 늘 무기력했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어느 순간 재난이, 사고가, 범죄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텐데 뭐... 그건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런 마음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기란 쉽지 않다. 뜻대로 하소서, 할 뿐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부유하다 가라앉았고 그런 중에 고모가 생각났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소송은 고모의 작품이었다. 대체 고모는 왜 그랬었을까. 아버지가 미웠다한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무지렁이를 잡겠다고 인감 위조며, 그 두꺼운 사실증명이며, 그 유명한 변호사 선임이며,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일인가? 대체 아버지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잘 재워놓았던 분노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고모의 김치찌개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여동생의 김치찌개를 좋아했다. 입맛이 없으면 옆동네에 사는 고모네 집에 가서 언제고 밥을 달라고 했다. 고모의 음식은 도시스런 정갈함과는 다른, 시골의 깊은 맛이 있었다. 특히나 고모의 김치찌개는 김치가 입 안에서 녹을 정도로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나도 고모네 집에 가면 그저 김치찌개 하나로도 밥 한 그릇이 모자라곤 했다.


고모는 아버지가 언제 와도,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밥상을 차려주었었다. 동갑내기 사촌과 노느라 내가 고모네 집에 먼저 가있다가 그런 아버지와 고모를 본 적이 꽤 있었다. 고모는 늘 '작은오빠'인 아버지를 안쓰러워했고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고모가 택시회사를 차려 아버지를 지입기사로 일할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무슨 일로 사이가 틀어졌는지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법정싸움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김치찌개를 그 기도실에서 떠올리며 고모를 생각했다. 그리고 고모를 용서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용서했다기보다 그동안 고모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고모는 아버지를 사랑했었다. 아버지에게 그토록 모질게 했던 것은 아마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겠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성숙했으리라는 기대는 없다. 아마 고모는 아버지에게 많은 허드렛일을 맡겼을 것이고, 아버지는 지쳤을 것이다. 그러그러한 일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폭발했겠지.


엄마가 들으면 기절할 일이다. 고모를 이해한다고? 고모를 미워했던 걸 미안해한다고?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애써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인생의 어느 때 고모를 만나게 되거나, 동갑내기 사촌을 만나게 되면 따뜻하게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 아버지로 인해 눈물 흘릴 사람은 나 외에 고모뿐일 테니.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내 마음을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은 엄마나 동생들이 아니라 고모일 테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내가 풀어야 할 마음의 매듭은 고모에 대한 것 하나 만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스무 해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나는 그 얽히고설킨 수많은 매듭 중에 겨우 한 가닥만 풀었을 뿐이다. 


나는 그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용서라는 게 단순히, '나 상처 받았어. 앞으로 그러지 마.'가 아니라, '그동안 미워했어. 그래서 미안해.'라는 걸 말이다. 용서한다는 마음보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들 때, 정말 그 매듭을 온전히 풀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날 기도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내 힘과 의지로 된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오히려 저항했다. 지난 일이니 글로는 술술 썼지만 그때는 몸에 진이 다 빠질 만큼 힘들었다.


남은 매듭들도 내 힘으로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스무 해가 한 번 더 가는 긴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끝까지 나를 잠식하는 쓴 뿌리들로 품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뜻대로 하소서... 전 모릅니다.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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