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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Oct 07. 2020

오해...였을까

아버지가 사흘 째 들어오지 않는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집에 내려가던 날 나는 완전히 과잉 각성 상태였다. 눈이 두 배쯤 커진 채 감을 수 없게 고정된 것만 같았다. 고속버스터미널로 전철을 타고 가는 내내 꼿꼿하게 서서, 마치 닭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실 머릿속은 하얬고, 현실감은 없었다. 그때 전철 광고판에서 나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경 구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원래 전철 광고판에 성경 구절이 종종 있었던 건 지도 모르겠다. 그날 만이라고 기억하는 건 그때 내가 특별히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그 구절이야말로 정말 붙잡을 만한 것 아닌가?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를 하라잖은가.


그 구절을 보고 나는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잉 각성 상태를 벗어났다. 눈을 편하게 깜빡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닭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조금 안정된 상태로 고속버스를 탔다. 도착해서 엄마와 얘기를 하고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니 결혼식 때 사진 찍어준 곳에 얘기해서 영정사진을 만들어 놔."라는 지시사항을 받아 들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 편도 네 시간 길을 달려오라고 했던 거였다.


스튜디오에서 뒷배경의 꽃들을 다 지우고 만들어준 ‘혹시 모를’ 아버지 영정사진은 며칠 후 기어코 장례식장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니 꿈에 늘 그 양복을 입고 나타나셨던 것도 무리는 아니네.


'거짓말쟁이.'


몸은 교회에 다녔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였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며.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며. 그런데 왜 그날 내게 하필 그 구절을 보여주신 거지? 사람 놀려? 자살자의 유가족, 혹은 자살 생존자로서 교회에 다니면 곳곳에서 이런 암초들을 만나게 된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때로 감동적이지만, 그것은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보편적인 성도의 기준에서 느껴질 것이라고 추측되는 감동일 뿐. 내 진솔한 감정은 분노와 원망이었다.




아들이 아직 걷기 전이니 그때가 4년 후쯤이었나보다. 남편의 친한 회사 동기와 강원도의 콘도로 가족 동반 여름휴가를 갔다. 그 집은 세 살짜리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었다. 첫날 설악산 케이블카를 탔다. 사람이 많았고, 탈 때는 몰랐는데 출발하고 보니 고도가 아찔했다. 딸은 저만치에서 새로 만난 귀여운 동생과 밖을 보며 놀고 있었다. 아들을 안은 채 저 아래로 아득한 낭떠러지를 보는 나의 머릿속에는, 이제 너무 익숙해진 사고 시뮬레이션이 떠올랐다.


'만약 케이블이 끊어져서 추락하게 되면 난 어떡해야 할까?' 멀리 있는 딸을 한번 쳐다보았다. 너무 멀다.

'추락이 시작되면 아들의 귀를 막아주고 나만 볼 수 있게 해야지. 그리고 땅에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 평온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볼 거야. 두려워하지 않게...'


순간 나는 다시 지하철 광고판의 성경구절을 떠올렸다. 그거였나?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추락의 순간에 내가 중력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던 건가... 알 수 없다. 우연한 일들을 억지스레 꼬아붙인 과잉해석일 수 있지 않나. 그런데 부모가 되고나면 괜찮지 않을 때도 아이를 꼭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주사를 기다릴 때처럼 말이다. 명백히 거짓말이고 아이는 곧 배신당하더라도.


이제 선택해야 했다. 괜찮다는 거짓말이었는지, 그저 우연이었는지. 인생은 수학이 아니고,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다. 어쨌거나 무엇을 선택하든 진실일 것이다. 나는 살기 위해서 믿기로 했다. 우연을 선택하면 내 삶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우연히 뽑은 재수없는 ‘꽝’이 되고 만다. 나를 믿다가 주사를 맞고 약이 바짝 올라 뗑깡을 부리면서도 결국은 내 품에서 잠이 드는 아이처럼, 뗑깡을 부리더라도 그 안에 남아있기로 했다.


이것이 나의 용서와 화해, 두 번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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