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J가 악성 민원인을 만난 썰

fiction? nonfiction? whatever!

by 장완주

윤숙 씨가 시청으로 발령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안면인식장애에 가까운 그의 눈에 자꾸 익숙해지는 방문객이 있었다. 그 자는 여름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민원실에 왔다. 뭔가 업무를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직원 식당에 가보면 거기서 혼자 앉아 밥도 먹고 있다.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날 그 자가 민원인 한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어찌나 입이 걸레이던지 그 찰지고 더러운 욕지거리가 귀에 아주 착 들러붙어서 윤숙 씨는 하루 종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자를 저지하지 않았고, 민원인과 한참을 싸우다가 둘 다 나갔다. 윤숙 씨가 이 모든 상황을 의아하게 지켜보다가 나중에 옆자리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몇 년째 단골손님이야. 여기서만 그러는 줄 알아? 민원실 한번 훑고 나면 다른 부서로 가고, 시청을 아주 헤집고 다니면서 온통 시비를 걸어. 지 고등학교 선배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돈도 뜯어내는 모양이야."

"아니, 그런데 왜 가만 놔둬요?"

"으이그... 무서워서 어떻게 건드려? 조현병이래. 한두 해 전에 식당에서 칼 들고 난리 친 적도 있어."


윤숙 씨는 기가 막혔다. 보아하니 그 자는 아무 직원 자리에서나 전화기를 함부로 쓰고, 소리 지르고 물건을 걷어 차고, 아침마다 민원인용 팩스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 누군가에게 수십 분간 시비를 거는 바람에 팩스를 쓰지 못하고 기다리던 민원인들이 직원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 직원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하루는 윤숙 씨가 출근하다가 길에서 그 자를 보았다. 그 자도 시청으로 추,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직원들과 같은 시간대에 와서 삥 뜯고, 공짜밥 먹고, 행정 기물 마음대로 쓰고, 간식 실컷 빼먹고, 신나게 놀다가 집에 가는 거네... 한 마디로 시청이 놀이터구만...'


가장 표면적인 문제는 아무에게나 욕을 퍼붓는다는 거다. 뭔가 심사가 뒤틀리면 민원 대기석에 앉아서 때로는 직원에게, 때로는 민원인에게 거하게 욕설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시비를 걸었던 민원인이 경찰 아저씨여서 끌려나간 적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몹시 착한 경찰 아저씨였던 듯. 정의구현은 이뤄지지 못하고, 그 자는 몇 분 후에 웃으며 다시 민원실로 돌아왔다.


직원들은 그 자가 무서워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심지어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말도 안 되는 서사를 씌워서 '불쌍한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면 당하는 마음이 좀 편한 걸까... 사무실의 가장 프라이빗한 장소인 탕비실 냉장고를 털어가도, 팀장 자리에서 전화기를 함부로 써도, 그저 떨면서 못 본 척했다. 그 묵인과 방관이 그 자의 영역을 점점 넓히고, 기행을 점점 더 키우고 있었다. 윤숙 씨는 상황 파악이 끝났다.


'어... 난 그 꼴 못 본다.'


윤숙 씨는 그날부터 조용히 계획을 세웠다. 머릿속에 알고리즘이 그려졌다. 아직 공중전은 안 겪어봤지만 산전과 수전은 충분히 겪어봤으니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 미션은 내가 드러나지 않게 해결해야 돼.'

찐 INTJ 이카리 겐도(신세기 에반게리온, 출처: hipwallpaper.com)


1. 조직의 해결 의지를 확인한다.

윤숙 씨는 총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자꾸 와서 욕설을 하는데 무서워서 일을 못하겠어요. 이건 조치를 취해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우는 소리를 했다. 당연히(?) 답은 "정신병인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뭔가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저희로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알아서 피하세요."이다. 아... 그래? 사건이 필요해? 니가 먼저 말한 거다. 내가 곧 만들어줄게.


2.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한다.

어느 날 팩스의 전화기가 사라졌다. 윤숙 씨가 그전 날 저녁에 떼어낸 것이었다. 그 자가 팩스의 전화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동안 민원인이고 직원이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가 아니라, 그 자의 성향을 알 필요가 있었다. 후크는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았으니 문서는 문제없이 송수신이 될 것이다. 음성통화만 안 될 뿐.


윤숙 씨의 전체 계획 중에 가장 마음 졸이는 순간이었다. 그 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서 다음 단계를 계획해야 했고,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자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팩스로 전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이가 마흔몇 살이라더니... 애구나.' 생각보다 어렵진 않겠다고 윤숙 씨는 생각했다.


3. 나는 너 안 무서워.

이제 기다릴 차례다. 빌미가 생길 때까지. 초장에 너무 승부를 보려고 하면 안 된다. 윤숙 씨는 집요하게 타이밍을 노렸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윤숙 씨가 민원대 점심 당번을 하는 중이었다. 그날 용감한 구내식당 영양사가 그 자의 공짜 식사를 저지했다. 그 자는 분풀이로 또 민원실에서 입으로 쓰레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xxx 공무원 새끼들, 내가 낸 세금으로 돈 받는 주제에 씨x 내 돈 아까워서 이런 썅x들 다 죽여버려."

"도대체 누구한테 욕하는 거예요! 나가세요."


윤숙 씨는 일어서서 복식호흡으로 우렁차게 쏘아붙였다. 그 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허리손을 하고 다가왔다. 윤숙 씨는 코웃음을 치며 그 자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나는 너 안 무서워.'


"어디서 이런 또라이같은 년이!"

"욕하지 말라고 했죠? 누가 누구보고 또라이라는지 모르겠네. 나가세요, 나가라고!"


그 자는 역시나 눈을 부라리며 알 수 없는 얘기들을 구시렁거렸으나 잠시 후에 의자를 걷어차고 사라졌다. 사무실 안에 점심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쉬던 직원들이 꽤 있었으나 다들 못 본 척. 아무도, 아무도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나중에 몇몇 여자 주사님들이 윤숙 씨에게 "그러지 마. 너 밤길 조심해."라고 했을 뿐.


윤숙 씨의 알고리즘에 타인의 조력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동안 치른 산전수전에서, 특히 조직 내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방관자였다. 윤숙 씨는 그 방관자들을 움직일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1차전을 치른 후 1시에 교대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함께 간 직원들이 "주사님은 무섭지도 않아요?" 했다. 윤숙 씨는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가 낸 세금이 내 월급이라고? 웃기고 있네. 요즘은 기초생활수급자도 세금을 내나? 하지만 쓸데없는 비아냥으로 자극해선 안 돼. 칼을 잡았던 자라는 걸 명심해야 돼. 승질 죽여.'


4. Make a scene #1

윤숙 씨는 또 기다렸다. 싸울 명분이 없는데 섣불리 나서면 100% 진다. 문제 직원으로 찍힐 뿐이다. 조직이나 법은 공무원 편이 아니다. 윤숙 씨가 예상하는 그림이 있었다.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시도해서 한 번만 그 그림을 만들면 성공하는 것이다. '그럴 만한' 소동을 일으키는 것, 그게 윤숙 씨의 목표였다.


때는 왔다. 슬금슬금 나와바리를 넓히는 그 자의 성향 상, 새로운 자리로 옮겨간 윤숙 씨네 부서의 공간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입구에서 또 허리손을 하고 새 놀이터를 바라보며 탐욕스러운 미소를 짓고 가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역시나 민원대 안으로 쑥 들어왔다. "용무 없으면 나가세요. 어딜 함부로 들어와요!" 윤숙 씨에게 저지당한 그 자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로비에서 그 자가 make a scene 하는 바람에 총무과에서 담당자와 팀장님과 청원경찰이 내려왔다. '사건이 나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셔서요.'


"내가 뭘 했는데? 나는 그냥 TV 보러 들어온 거라고! 근데 저 여자가 나가라잖아아아!!!!! 너 몇 살이야!!"


아니, 청내 방송에 나오는 시장님 주재 회의가 재미있나? 그걸 보러 들어오게? 가만있자... 우리 시청에 청원경찰이 있었어? 와... 그러구나... 청원경찰이 있긴 있구나... 하는 깨달음의 순간 그 청원경찰님이 윤숙 씨에게 말했다. "왜 정신 오락가락하는 애를 건드려요?"


아무래도 더 큰 그림이 필요한 것 같다.


5. Make a bigger scene #2

또 기다렸다. 그 자는 분명 또 들어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구역의 진정한 미친년임을 보여주리.' 그 자는 한동안 윤숙 씨네 민원대 앞에서만 씩씩대더니 민원 대기석에 앉아있는 행정사 직원들을 깔짝거리며 삥을 뜯었다. 그들은 늘 아주 쿨하게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었다. 그러다가 또 하루, 민원대 앞 소파에 앉아서 또 발에 걸리는 것들을 죄다 걷어차며 욕설을 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서 과장님 자리로 삿대질을 하며 덤벼들었다. 윤숙 씨는 벌떡 일어나서 민원대에 있는 직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말한 후 육탄전(?)을 감행했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죠! 나가라고요, 나가!"


그 다음엔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윤숙 씨에게 주먹을 쥐고 "확, 씨x" 하며 덤비는 그 자를 과장님과 남직원이 저지하고, "나가라고!" 하며 덤비는 윤숙 씨를 팀장님과 다른 여직원들이 붙들었고, 두 명의 직원이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고, 다른 직원은 총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윤숙 씨가 그 자와 고래고래 맞고함을 지르고 옆에서 여러 명이 육탄전을 저지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휴대폰에 담겼다. 게다가 이번에는 민원인들과 옆 부서 직원들이 모두 구경(=목격)했다. 마지막에 그 자가 쓰레기통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퇴장하는 모습까지 제대로 make a scene이다.


총무과에서 재차 왕림해주셨고, 어느 직원인지 익명 게시판에 '악성민원인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셨으며, 댓글이 수십 개 이어졌다. 이제 된 것 같지?




그 후 그 자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총무과는 바로 다음 날부터 민원실에 (그동안 그토록 애원했던) 청원경찰 두 명을 배치했으며, 민간 경호업체와도 계약한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악성 방문객의 놀이터로 전락했던 시청은 이제 지긋지긋하게 앓던 이를 하나 뽑아내게 되었다. 윤숙 씨가 1번에서 5번까지 간 시간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윤숙 씨는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겁은 났다. 그동안 수도 없이 "밤길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고, 실제로 밤길에, 이른 아침 출근길에 그 자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윤숙 씨가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이건 옳지 않은 일이잖아.' 윤숙 씨는 고개를 숙이거나 피하지 않았다. 얘기를 들은 윤숙 씨네 아이들은 길길이 뛰었다. "엄마 때문에 심장 쫄려서 못 살겠다고오! 제발 조용히 살아."


윤숙 씨가 그 자를 몰아낸 건 아니다. 요즘 들어 점점 심해진 그 자의 난동에 익명의 직원들이 게시판에 항의함에 따라 담당부서인 총무과에서 자발적으로 인력과 예산을 마련한 것이다. 윤숙 씨는 아주 사알짝만 밀어준 것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배트맨을 보며 말했었지.


As you know, madness is like gravity. All it takes is a little push.


미친놈을 그대로 두면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누군가가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윤숙 씨는 그 사이에 있었고, 아무도 죽거나 죽이지 않는 결론으로 중력을 조금 얹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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