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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Oct 10. 2020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내내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왜 그때 모든 것을 팽개치고 집에 내려가서 아버지를 돕지 못했을까. 직장일이 바쁘다고, 결혼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만약 지금 모든 걸 버리면 나는 영영 되돌아오지 못한다고 핑계를 댔던 스물일고여덟 살의 이기적인 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5분 동안을 말없이 오열하고 끊었을 때, 나는 새로 옮긴 직장의 사무실에서 과장님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생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아들 타령을 그때 누군가에게 하셨더라고, 나중에 얼핏 들었다. "아들 하나만 있었더라면 내가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이라 하셨다 한다.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혼자 법원에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함께 법원에 가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인감의 위조를 증명하고,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그렇게  수는 없었을까? 아들이라야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겠지만 ‘키워봤자 소용도 없는 딸자식’이라는 세간의 중론을, 나는 내게 요구되는 무력함의 핑계로 삼은 것이었다.


만약 내가 기어이 그렇게 했더라면 이겼을까? 이겼더라면 아버지는   있었을까?


소송 초반에 우리 팀 부장님이 변호사인 친구분과 전화로 상담하게 해 주셨을 때, 그 변호사님은 내게 말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로 부모님이 돈을 빌리고 안 갚으셨을 수 있어요. 따님 입장에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죠. 그러니 서류가 위조된 걸 반드시 증명하시고, 반드시 맞고소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원은,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맞고소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요. 그러면 불리해집니다."


엄마에게 일단 위조 증명을 하라고 말했으나, 엄마는 돈이 70  든다며 결국 하지 않았다. 맞고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말 돈이 없어서  하는  아니었다. 엄마가 관련됐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이제 더더욱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구하러 직장을 그만둘  있었을까?'라는 내면의 질문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버릴 자신도, 이길 자신도, 구할 자신도 없었다. 질문은 매번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고 후벼 팠다. 그런데 언제쯤이었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무릎을 꿇을 순 있었어.'


변호사님도 말했었다. "우리나라 민사소송은 거의 다 감정싸움이에요." 그래... 내가 아들이 아니라서,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그 송사를 이길 수가 없다고 포기했었는데, 문제는 송사가 아니라 고모의 상한 감정이었던 거야. 나는 고모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었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가 났는지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고, 대신 용서를 구하고, 요구하는 게 있다면 시간을 정해서 해결하고... 나는 그 일들을 할 수 있었고, 했어야 해.


그래 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그때 나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다만 살아남아야 하는 나를 자꾸 땅 밑으로 잡아끄는 어떤 끈이 하나 풀렸을 뿐이다. 지금도 가끔씩 내 마음속의 죄책감은, 내 손목을 스스로 칼로 긋는 상상 하나를 휙 던지고 사라진다. 마치 그것이 나의 죗값이라는 듯이. 언젠가 너도 그렇게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환각은 사라졌지만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상상의 습격은 아직 남아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도 나의 머뭇거림에 죗값 하나를 꼬박꼬박 던져주었었다. ‘넌 여전히 이기적이야. 넌 아무도 구할 수 없어.’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다른 답을 하고 있다. 스물일곱 살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마흔일곱이 되어서야 뒤늦게 답을 찾긴 했지만.


이제 나는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아버지를 구하진 못했지만 나는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구할 수 있다. 남자가 아니라도, 돈이 없고 힘이 없어도, 나는 나를 내놓겠다.




런 결심을 한  얼마  돼서 친구가 내게 <이태원 클라쓰>  보라고 추천했다. 드라마를   보는 데다 이미 종영한 후였다. 그래서 네이버 클립만 보았는데 마지막에 박서준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쉬운 하는 장면이 있었다. 맞아... 그렇지... 우린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내놓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던 어린 자신을 용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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