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직장 건강검진에서 특정 암의 종양표지자가 정상 범주보다 많이 높다며 외래진료를 보라는 전화를 받았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정말 암이 맞다면 이 유형은 진행속도가 매우 빠르고 수술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했다. 대개 기대여명이 1년 이내라고. 아마 내 인생에서 죽음이 가장 현실적이었던 날일 것이다.
낮에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놀라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애써 나를 안심시키려는 간호사님의 말에, 상관도가 어느 정도냐, 어느 과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대충 계산해보았다. 치료비가 아닌 진단금이 나오는 암보험을 들어놓았으니 확진이 되면 보험금으로 빚을 털면 되겠다... 아이들에게 빚을 남기진 않겠구나... 이제 자살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건가...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요즘은 눈을 감아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정(靜)의 상태는 가장 광포한 폭풍을 몰고 온다. 폭풍 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반년 정도 동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지금은 공무원을 후련하게 때려치워버린 동생이었다. 삼십 대 중반을 지나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유난히 많은 죽음을 치러내면서 깊은 마음의 병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나와 마찬가지로 사망신고 접수 업무를 몹시 무겁게, 아프게 하던...
10년이 넘도록 깊은 우울을 위태롭게 견뎌왔던 동생이 작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다시 한 달 간격으로 친한 지인의 죽음을 겪었다. 사무실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폭풍처럼 울었다. 왜 다들 이렇게 쉽게 가버리느냐고 무너져갈 때 나는 말했다.
"걱정 마, 나랑은 맘 놓고 친하게 지내자. 난 죽지 않는 게 인생 목표라서 너 마음 놔도 돼."
얼마 후에 동생은 내게 말했다. "언니, 나 살 거예요." 이를 꽉 깨물고 눈물을 떨구며 다짐하듯 말하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몹시도 마음이 아렸었다. 우리 같이 살아내자고, 희망 따위 없어도 숨을 쉬자고 그랬었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에겐 약속을 지킨 거겠지만 동생에게는 아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CT 결과는 정상이었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무감각했다. 이 일들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이 놓였을 뿐이다. 동생에게 내가 필요했던 순간은 이제 거의 지나가고 있다. 서서히 연락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소식이 뜸해져도 어색하지 않도록...
내게 '산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숙제다. 그리고 그 숙제를 잘하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작은 숙제들을 하는 중이다. 상담 선생님이 '지금'에 집중하라고 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게 정(靜)의 상태는 치명적이다. 머릿속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나는 지금에 집중하라는 숙제에 대한 다른 해법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 과거에 수없이 켜있는 불빛들을 모두 끄기 위해서 무아(無我)의 시간을 보내는 것... 이전에는 중독된 것처럼 책을 읽었다. 그때 미친 사람마냥 종일 도서관에 처박혀 카뮈와 키르케고르, 카프카에게 시간을 버렸다. 내가 '지금'에 집중하는 방법은 '지금'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책을 읽기조차 쉽지 않다. 머릿속의 폭풍이 그때보다 더 심해진 건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의 가장 사랑하는 책을 새로 샀는데도 글자가 자꾸 날뛰는 것 같아서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머리맡에 한 달째 놓아두고 있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워져 버렸다.
책을 읽을 수 없어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정(靜)이 아니면 동(動)이지 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유튜브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을 위해, 나의 모든 과거를 함께했던 린킨파크를 잠시 접어두고 새 노래들을 찾았다. 멜론 이용권을 결제하고 릴*이와 이*윤을 듣는다. 가사에 집중하면서 매일 수없이 듣고 또 듣고... 과거를 생각할 겨를이 없도록.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의 문제 때문에 과거의 어둠을 소환하는 것은 결코 성숙한 태도는 아닌 거야.
물론 과거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풀고, 지금의 문제는 또 이것대로 풀어야 하는 거다. 퉁칠 수 없는, 퉁쳐서는 안 되는 개별 사안이다. 현재의 문제가 쉬운 것도 아니다. 밥을 제대로 못 먹게 된 지가 오래다. 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과호흡으로 몸에 마비가 와서 응급실에 갔었는데 심장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연휴에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하자마자 다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공황장애인 것같다고 약을 처방받았다. 뭐 좋은 거라고 정신병이 하나씩 늘어난다.
어쩔 수 없다. 한 번 깨진 건 계속 더 금이 가기 마련이다. 몸이 늙는 것처럼 나에겐 이것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걸 과거의 모든 일들과 연관시키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몰랐던 답들이 내게 손을 건넸다. 지금 내게 해야 할 일은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서지 않도록, 이 새로운 증상이 내 머릿속에 깊은 물길을 내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것이구나... 그 답들은 노래들과 함께 버려진 시간 속에 묻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음악은 구원이다. 숨이 가빠질 때... 손이 떨리기 시작할 때... 서둘러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다. 지금을, 시간을 버린다. 그렇게 나는 몇 분짜리 노래로 만들어진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이 시간을 건너고 있다. 내가 다짐한 것처럼, 동생이 말했던 것처럼 우린 살아야 하니까. 살기로 했으니까.
이제 눈을 감고 잠이 들 때, 이어폰을 끼고 머릿속의 폭풍 대신 피아노와 스트링 위로 떠오른 달을 생각한다. 그리고 노래가 들려주는 대로 상상해본다. 저 달 위에 첼로가 하나 있고, 그 달이 참 예쁘다고. 그것이 나의 지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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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을까 싶어 노래의 가사와 제목을 인용한 부분은 다른 색깔로 다시 표시했습니다. 글 제목 역시 수정하였습니다.
릴*이 <내일이 오면>
이*윤 <달이 참 예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