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의 크기가 다르다. 언젠가 직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농담처럼, "나는 트레일러에 살아도 될 것 같아"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내 앞자리 주사님이 그 얘기를 듣더니 나에게 "어울려요" 했다. 사실 나는 농담이 아니었고, 내게 어울린다고 말한 직원도 전에 나에 대해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서 가끔 땅을 보러 다니는 것이 취미인데, 어느 동네에 갔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말이다. 어, 내가 점찍은 곳이 바로 그 동네인데.
집, 이사, 살림... 애초에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과 방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딸은, 자신의 그런 성향이 집에 대한 엄마의 불안정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결핍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두 가지이다. 아예 포기하거나, 더 욕망하거나. 나는 전자이고 딸은 후자인 것이다. 나는 그런 딸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직도 '집'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대상에 묶여있는 것이 너무 버겁다.
결혼을 했을 때 나는 막연히 이제 정착할 공간이 생기겠구나 생각했다. 세간이 구비된 단독 주거공간. 나에게 집은 그냥 그런 의미였다. 그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하는 동안 거쳐갔던 공간들에 정을 붙여본 적이 없었다. 나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리워했던 공간은 외갓집 정도? 그것도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나 그러했다.
시아버님의 빚을 갚느라 우리집 전세금을 드리고 나서 시댁에 오랫동안 객식구로 얹혀 지냈다. 남편과 아이들은 피붙이였으니 환대를 받았으나, 어머님은 내게만은 모질게 선을 그으셨다. 방 네 개짜리 49평 아파트에서 우리 식구에게 현관쪽 작은 방 하나를 내주시곤 이불장 한 칸도 더 쓰지 못하게 하셨다. 결혼한 시누이의 방과 빈 방 하나는 그대로 남겨두셨다. 살림살이를 비롯해서 나와 아이들 물건을 모두 버리고 들어갔다. 언젠가 친구가 고가의 오르다 교구를 한 세트 주었다. 가져와서 거실에 펼쳤다가 "제 집도 아닌데 어디서 쓰레기같은 걸 집안에 끌고 들어왔냐"는 야단을 맞고 하루종일 울었다. 그걸 남에게 준 후로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객식구의 미덕은 '없는 듯'이 사는 것이다. 나는 시댁에서 사는 동안 나의 존재를 꼬깃꼬깃 접어서 축소하는 방법을 배웠다. 시댁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에 대해서 그랬던 것 같다. 결핍에 대처하는 나의 선택은 언제나 '포기'였다. 게다가 나는 친정의 사건으로 지은 죄가 많은 며느리라서 집에 있으면 '돈을 안 번다'고, 일하러 나가면 '애 놔두고 어딜 가냐'고 마음껏 탓할 수 있는 객식구였다. 집은 내가 있을 자격도, 없을 자격도 모호한 공간이었다.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살았다.
그 후 몇 번 더 이사를 했다. 빈 손으로 시댁을 나와서 남편이 일하던 대안학교 기숙사 사택에 객식구로 살다가 또다시 빈 손으로 쫓기듯 나왔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길바닥에 나앉을까봐 무서웠다. 저소득층 전세자금 대출요건에 맞는 단독주택을 급히 구하고 시청 사회복지과를 찾아갔을 때 신청서에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수치심으로 경련이 이는 얼굴을 내내 들지 못했다. 도로변의 지대 낮은 그 집은 폭우가 쏟아지자 보도의 빗물이 집으로 쏟아져 뒷마당의 폐쇄된 변소까지 잠겼고, 앞마당은 똥물과 빗물이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고무장갑을 끼고 비를 맞으며 하수구를 파냈다.
시부모님이 그 49평 아파트를 정리하고 조금 주신 돈으로 작고 오래된 주공아파트를 사서 9년을 살았다. 정을 붙이며 오래 살아보려 애썼다. 붙박이장을 맞추고 거실에는 가득 책을 채웠다. 베란다에 식물을 키웠다. 아이들에게는 몇십 년 쓸 수 있는' 튼튼한 침대를 사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23평 아파트는 너무 컸다. 내 집이라며 정을 붙이기에 나는 너무 작아져있었다. 공무원 급여로 대출금, 공과금, 수리비를 감당하는 것도 버거웠다. 별거한 남편과 묶여있는 공동명의도.
"엄마가 이 집 팔면 나는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라며 독기를 뿜던 딸이 마침내 집을 팔아도 된다 윤허(?)해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기적처럼 집을 팔 수 있었다. 매입가보다 많이 떨어졌지만 괜찮았다. 월세로 16평 아파트를 구했다. 아들이 곧 군대에 가니 적어도 2년은 방 두 개로 버틸 수 있었다. 책을 모두 팔고 침대도 팔았다. "2년 후에는 어떡할 거야?" 딸은 나에게 제대로 된 집을 마련할 계획을 내놓으라 종용한다.
내게 집은 결핍이다. 그건 뭐... 사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릴 때부터 쭉 그래왔기 때문에 '집이 주는 행복'에 대한 비교치가 없어서 아프진 않다. 결핍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욕망을 잠근 채, 높은 비교치를 아예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결핍에서 살아남았다. 못생겼는데 굳이 남들 연애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돈이 없는데 굳이 예쁜 옷, 좋은 가방을 탐내지 않았다. 기회가 없는데 내가 뭔가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굳이 탐색하지 않았다. 결핍한 것을 욕망하다보면 무리수를 두게 되고, 반드시 큰 역풍을 맞았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나는 드디어 점점 작아졌고,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트레일러에서 살고 싶어요. 컨테이너? 작을수록 좋아." 기상하면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샤워를 하고, 공공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점심을 편의점에서 먹고, 저녁에 운동하러 갔다가 트레일러로 돌아와 잠만 자면 된다. 내게 집은 침대와 화장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옷은 사계절 똑같은 청바지랑 티셔츠라서 공간박스 세 개에 다 들어간다. 앞자리 주사님이 임장하다가 내 생각이 났다는 동네는 공공 체육시설과 공공 도서관이 도보 5분 거리에 있었다. 나의 무덤덤한 결핍과 삶의 방식을 불필요한 감정 없이 이해해주는 그가 말했다. "거기 빨래방도 많아." 참 자세히도 봤다며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다.
친한 언니가 내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집이야! 관짝 아니냐, 관짝?" 어 맞아 언니.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거 맞아. 내가 사는 데에 필요한 집은, 내가 죽는 데에 필요한 딱 그 크기만큼이야. 내가 죽거든 그것만 치워주면 돼. 마치 이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듯이.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너무너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