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꿈과 희망의 요술나라인 피나리아 여왕은 지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딸인 밍키 공주를 내려보낸다. 밍키의 임무는 뭔가 문제가 생기면 마법을 써서 어른으로 변신하여 행복하고 아름답게 해결하는 것이다. 밍키가 만들어낸 꿈과 희망은 가끔 빛을 타고 피나리아로 올라가서 여왕의 왕관에 보석으로 박힌다. 그 보석이 열두 개가 모이면 피나리아는 지구로 돌아올 수 있다.
국민학교때 보았던 TV 만화영화 <요술공주 밍키>의 기본 플롯이다. 흑백 TV에서 컬러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같다. 케이블 TV도 OTT도 없었던 시절이라서 늘 TV 앞에서 방영시간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매 회마다 '오늘은 새 보석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두근두근했었다. 피나리아가 지구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써도 뭔가 규칙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밍키의 활약이 너무나 멋져 보였는데도 보석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어떤 날은 느닷없이 보석이 두 개나 날아와서 박혔다. '뭐지? 뽑기 같은 건가?'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인생은 규칙이 아니라 랜덤이라는 것을... 어릴 때 본 만화영화에 이렇게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나는 가끔 내 인생을 밍키의 세계관으로 상상하곤 한다. 피나리아 같은 환상계에 나의 지상생활과 연결된 왕관이 있고, 내가 뭔가 '꿈과 희망의 요술'을 부리면 내 왕관에도 마법의 보석이 빛으로 날아가 박힌다고 말이다. 만화와 나의 상상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릴 때의 나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보석 생성의 무규칙성, 예측불가능성이었는데, 어른이 된 나의 상상 속 왕관도 그렇다는 점이다. 와, 저건 보석 쏘아줘야 된다 확신했던 날은 그냥 지나가고, 시시하고 평범해 보이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일에 반짝이는 보석을 얻을 때도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 보석이 가뭄에 콩 나듯 정말로 희소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2025년 마지막 날인 오늘,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서 '잘 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이, 이 곳에서의 힘들었던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연락을 하면 그때의 감정이 새롭게 괴롭힐까봐 카톡 대신 기도만 하던 이가 3년 만에 전화를 주었다.
연말은, 소원했던 이들에게 연락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 친구의 갑작스런 전화가 전혀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친구는 자꾸 울었다. 나는 시덥쟎게 군대 간 아들 얘기를 하고, 대학원을 마쳤다는 얘기를 했다. "좀 덜 죽고 싶어질 때, 좀 잘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오래 연락을 못했었다고 하길래, 내가 잘 보여야 되는 사람이었냐고, 힘들면 전화했어야지! 했더니 너무 흉한 꼴을 많이 보여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그때가 자기 인생의 바닥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뭘 하며 잘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작은 회사에 다니며 작은 집에서 혼자 개를 키우고 산다고 했다.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고, 군대 제대한 큰 조카 이야기를 하고, 서울의 지옥같은 출퇴근 전철 얘기를 했다. 마치 엊그제 전화로 수다를 떨었던 사람들처럼 시시덕거렸다. 한참을 서로 할 말만 요란하게 하다가 조만간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서로 늙고 뚱뚱해진 건 흐린눈 해주기!"
그가 살아있다. 아주 잘. 시시하고 평온하게. 오늘 나의 왕관에 반짝이는 새 보석이 생겼을 것 같다. 그때 그와 마신 커피들, 민원실 벤치 앞에서의 오열, 시덥쟎은 것들로 같이 꽥꽥 퍼부었던 속풀이들, 잊고 있었던 그 시시했던 것들이 이렇게 선물처럼 돌아왔다. 설령 왕관에 박히지 않았어도 괜찮은 반짝이는 이 보석은 눈물이 1도 연상되지 않는 빨간 보석일 것이다. 붉은 말의 해라 하지 않는가. 우주로 날아가버린 꿈과 희망의 요술나라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구한테 자랑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보석왕관이 만들어지고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피나리아가 나에게 돌아오면 좋겠다. 2025년이 반짝이며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