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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May 23. 2020

아깝다

노화가 몰아치는 요즘, 밤마다 통증 때문에 몇 번씩 잠을 깬다. 왼쪽으로 누우면 어깨가 아프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골반이 아프다. 원래 옆으로 누워 자는 습관인지라 잠들 때 신경 써서 반듯하게 누웠다가도 잠결에 옆으로 돌아눕다가 그만 아파서 정신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어제도 자다 깨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꿈이 들락날락했는데, 그 비몽사몽 어느 즈음에 누군가가 넌지시 '지금 나를 따라가자'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꿈을 꾸고,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망자가 어느 다리 앞이나 길 앞에서 손을 내미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 사람을 따라가면 영원히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건데, 대부분 주인공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함께 가지 않고 남아 결국 생환(?)한다.     


그런데 어제 그 꿈은 그런 류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생사의 갈림길이 아니라 그저 매일의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고, 나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저, 목소리가 들렸(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 제안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가도 돼. 아무 미련이 없어.”     


같이 가자는 말에 대한 대답이 ‘미련이 없다’는 것이었다니, 어쩌면 김칫국 마신 건지도 모르겠다. 밥 먹으러 가자는데 죽어도 된다고 했을지 누가 아나. 아마도 꿈속에서 나는 그동안 봤던 많은 드라마 속의 클리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럴진대 그리 가볍게 따라나서는 ‘나’라니... 정말로 그 순간 몸이 몹시 가벼웠던 느낌이 난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여기서 탄성으로 중력을 밀어 올리는 키보드를 차가운 손가락으로 누르며 물리적인 시간 속에 살아있는가. 정말 김칫국이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만약 그 꿈이 정말로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자는 초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거라면, 그건 순전히 통증 때문이다. 그때 길을 나서며 하필 옆으로 돌아누운 것이다. 왼쪽이었다. 꿈에서 느꼈던 온몸의 가벼움 대신 어깨에 묵직한 압통이 몰려와 그 꿈을 벗어나버렸다. 신음 같은 한숨을 쉬며 다시 천정을 향해 돌아눕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어제 낮에 H 언니가 ‘잠자다가 죽었다’는 지인 이야기를 해줬던 탓일까, 아니면 어제 하필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낙망하고 허무해하는 그날이 또 와서일까. 또는 예고 없이 찾아올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뮬레이션을 너무 많이 했던 탓일까.     


내가 정말 떠날 준비가 됐구나 싶었다. 떠나려는 그 순간 나는 두렵지 않았고 되려 익숙했다. 아무 미련이 없다면서 그 말 끝에 아이들이 반짝 떠올랐던 것이 기억났지만, 그 또한 아이들 각자 몫의 삶이라고 수백 번을 되뇌었던 익숙한 루틴이었다. 그 길로 갔어도 됐을 텐데 이 망할 통증은 이래저래 발목을 잡는다. 살려줘서 고맙기는 개뿔, 이 고단한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이 아쉽다.     


다음번에 같은 꿈을 꾸면 그땐, 절대 돌아눕지 말아야지. 냅다 달려가야지 생각한다. 자면서 죽을 수 있는 게 어디 아무에게나 오는 행운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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