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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May 29. 2020

그 사건

어느 것 하나 오래 버티지 못하는 나에게도 드디어 내년이면 20년 차에 들어서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살아내는 일이다. 숨 쉬고 사는 것, 죽지 않는 것. 그 대단한 일을 내가 해내고 있다. 농담 아니다. 몇 번이나 이 악물고 버텨 다시 일어선 내 인생에 그 사건은 너무나 큰 구멍을 냈다. 다들 제 몫의 인생을 짊어지고 저 높은 곳으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나는 이토록 사는 것 만으로도 버거워하고 있다.


모든 것은 그 사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언제나 나의 결혼식부터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가장 빛나는 시절, 모두에게 인생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결혼식과 신혼. 비록 착각일 수도 있지만 꽃길의 출발선이라고 믿을 만한 그 때에 아버지는 자살을 했다. 그것도 실종 13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집을 나가신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열흘 동안 낮에도 밤에도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시신을 찾고 치른 장례식은 악몽 그 자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아버지를 마주하지 못했다. 장의사는 아버지의 상태가 너무 끔찍해서 차라리 유족은 안 보는 게 좋겠다며 친척 오빠만 입회시키고 염을 마쳤다.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 시신은 너무 왜소하고 작아 아버지같이 보이지 않았다. 장의사는, 간신히 뼈를 맞춰놨으니 건드리면 어긋난다고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너무 작아서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는 나에게 나 대신 상주 자격으로 들어갔던 오빠는 "고무장갑을 끼고... 반을 긁어냈어..." 했다.


아름답지도 않은 그 사건을 나는 가끔 이야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무엇 하나 오래 버티지 못하는 탓이다. 낯가림도 심한 사람이 자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 대충 이야기하고 나면 나는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조금 자유로와진다. 이전까지는 내가 너무 겉돈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열외를 인정해준다. 후련하면서도 입맛이 쓰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 없다.


얼마 전에 골반을 다쳤다. 바지를 입다가 발을 헛디뎌서 두어 번 깨끔발을 뛰었을 뿐인데, 서서히 통증이 시작되면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아프더니, 금세 평지를 걸을 때도 통증이 왔다. 어쩌다 병원 갈 타이밍을 놓쳐서 한 달이 넘도록 병원을 못 가고 약만 먹으며 절뚝거리고 다녔다.


정작 나는 다리를 절며 걷는 것이 익숙해지는 중인데, 사람들은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점심을 먹으러 내가 같이 가지 않거나, 조금 늦게 걸어가도 당연히 이해해 주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다리를 절던 그 시기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으면 "관심 받아서 좋다"고 웃고 말았다. 나의 내면과 겉모습이 일치했고 사람들은 적당히 나를 배려하고 피해주었다. 처음으로, 내 마음 상태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맞다. 나는 멀쩡하지 않다. 마음은 진작에 큰 고장이 났다. 20년을 이럴 일인가 싶지만 그 낭패감은 내가 가장 클 것이다. 남편은 나에게 '남들 다 겪는 일에 유난스럽게 군다'고 했다. 설마 그 '남들 다 겪는 일'이라는 게 결혼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자살한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도 길에서 비쩍 마른 노인을 보면 혹시 우리 아버지가 아닌지 가슴이 뛰는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자살자의 유가족, 혹은 자살생존자라고도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이전까지 인과의 법칙이 잘 통제하던, 예측 가능한 레일 위를 달리던 나의 세계, 내가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었던 나의 세계는 가장 높이 올라간 지점,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울 자격을 허락받는 그 지점에서 탈선했다. 추락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추락 중이다. 추락하는 인생에 인과법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열심히 살면 결실이 있고, 착하게 살면 안전한 세상은 이제 없다. 열심히 살면 이용당하고, 착하게 살면 짓밟히고, 가만히 있어도 빼앗기는 부조리의 공간에 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붙잡는 것들도 나와 함께 추락하는 것을. 나는 이 중력의 공포를 끝낼 방법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나를 연민하지 않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바닥에 부서지는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두 눈을 뜬 채로 중력을 견디기로 한 후부터 나는 고통에, 상처에, 공포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나의 목표는 이 기나긴 중력을 끝까지 견디는 것,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내 품 속의 아이들에게는 이 모진 중력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 나와 똑같은 추락의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언젠가 내가 땅을 만나 부서지면 나는 안식할 것이고 아이들은 제 삶을 걸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매일 시시포스로 생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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