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큰 외상을 남긴 건 아버지의 죽음 보다는, 실종소식을 듣고 난 열흘 간의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던 그때 백일몽이 시작되었다. 벌건 대낮에 내 의지와 무관한 환각이 덮쳤다. 핏물 구덩이가 보이고, 찢기고 꺾인 시체가 보였다. 시도때도 없이 칼 소리가 들렸다. 칼이 사람 속을 찌를 때 소리가 난다는 것을, 찌르는 자의 격한 숨소리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죽어가는 소리를 도대체 나는 어떻게 아는 걸까. 한번 시작되면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꿈은 멈춰지지 않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환각은 계속 심해졌다.
울 수가 없었다. 직장인의 공식적인 애도기간은 일주일이 아닌가.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던가보다. 나는 다시 직장으로, 신혼의 여자로 돌아와야 하는 암묵적인 요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의 자아는 계속 분열되었고, 분열된 자아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할퀴고 물어뜯었다. 남편을 이해한다. 아니, 이해 못한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 아니 내가 아버지를 버렸다. 엄마가 아버지를 죽였다. 아니 내가 죽였다. 아니 고모가 죽였다. 그들은 나도 죽일 수 있다. 숨어야 한다. 아니, 내가 죽여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아니,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다. 배가 고프다. 아니, 이 상황에 배가 고파? 니가 사람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불과 40일 전에 결혼식을 가득 채워주었던 친구들은 어쩌면 신기루였던가보다. 조문도, 위로도, 심지어 '들었다'는 표시도 없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던 두어 명의 대학 동기가 고맙게도 먼 길을 다녀가 주었을 뿐이다. 그때는 몰랐다. 텅빈 장례식장,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줄래?"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겨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던 구름 위의 세계에서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흉상(凶喪)은 그 세계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던 거다.
나의 존재는 더 이상 묵인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내게 전화를 걸지도,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나는 좀 바보같은 데가 있어서 처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그들을 그냥, 바쁜가보다 하고 지나다가 아주 여러 번 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내가 거부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모임을 빼고는 한 순간도 추억하기 힘든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다시는 모임에 가지도 사람들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삐쳐서가 아니라 빠져준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세계에 살아야 하는 남편과 시댁은,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정말 똥 밟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아들에게 '저런 못생긴 걸 어디서 데리고 왔냐'고 하셨다던데, 아마도 맞벌이할 만한 적당한 학벌 하나 보고 허락하셨을 결혼이었다. 거기다 생전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식 올린 지 한 달 만에 보니 추악한 집안 싸움으로 사돈이 자살을 하고, 며느리는 냅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혼자 돈벌이를 시키고... 기가 막힌 사기 결혼이었다고 나를 비난하셔도 틀린 말이 아니었을 상황이다. 신앙이 깊으신 분들이라 아무 내색 없이 감내하셨을 뿐. 나는 그 죄책감에 끊임없이 '정상인'의 삶을 연기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두 아이를 낳았다. 맏이를 임신했을 때는 환각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지켜야 할 아이가 생기고 보니,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가 더 컸다.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대는 것만 같았다. 칼부림, 전쟁, 사고의 공포영화를 눈 앞에서 강제로 틀어대는 듯, 때론 가만히 선 채로 때론 감자를 깎다가 숨을 쉬지 못하고 굳어있곤 했다.
그 일들은 현실과 아무런 경계없이 시작되었다. 현실의 시공간에 칼소리가 얹어지고 눈 앞에 있던 싱크대가 사라지고 내 몸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은 그냥 순식간에 훅 들어온다.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내가 또 이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데, 내가 숨을 안 쉬는지 못 쉬는지 하고 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굉장한 낭패감이 들었다. 이미 온몸과 정신이 유린당해버렸다는 무력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움직이지 못했던 몸을 묶은 보이지 않는 밧줄을 세차게 흔들어 풀며 숨을 몰아 쉬었다.
아이는 내 뱃속에서 그 일들을 고스란히 겪었다. 오리가 아홉 살 무렵에 그 아이의 정신 깊숙한 곳에 심어진 나의 환각의 존재를 확인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기가 막혔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임신으로 인해 이를 악물고 환각과 싸웠고 임신 말기 즈음에는 환각이 시작되자마자 몸을 움직여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밖에서는 아무와도 나눌 수 없었던 나의 고통을, 절대 나눠주어선 안 될 아이에게 짊어지게 하고 나는 일어선 것이다.
신혼집에서도, 시부모님과 합쳐 살던 집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울 수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내 아버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애도는 커녕, 나에게 아버지는 있었으나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고, 그 사건 역시 나의 주변 모두에게 상기시켜서는 안 될 의무가 나에게 있었다. 내 안에 결계를 치고 겉으로는 밝게, 열심히, 까칠하게 살았다.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강단에 서서. 우스개소리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가두고 살았던 11년이 흐른 어느 날 차를 몰고 나가서 마트 주차장 구석에 주차를 했다. 자살유가족센터라는 곳을 인터넷에서 찾아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가슴에서 울음이 터졌다.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미친 사람처럼 울며 소리를 지르며 말을 하고, 또 했다. 상담원이 나에게 다른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전화를 드릴 것"이라고 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다시 말을 했다. 눈물이 났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 또 엉엉 소리를 지르며 울고 말하고 울었다.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통화를 했던 곳이 아마 광역정신보건센터였던 것 같다. 방문하라는데 가지 않고 몇 달이 흘렀다. 두 시간 운 걸로 충분히 창피했다. 드문 드문 문자가 왔다. 한 번 찾아가서 면담을 했다. 약물치료를 권유받고, 나 때문에 회의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병원에 갔다. 그 사건이 있고 11년이 지난 때였다.
우울증은 너무 당연했는데 PTSD 진단이 같이 나왔다. 환각은 전형적인 증상이라 했다. 전형적...이라고? 그럼 내가 겪은 모든 것들이 남편의 말처럼 '유별나게 굴었던' 게 아니란 거야? 이게 치료가 된다는 거야? 그걸 모르고 내가 병이 있는데도 임신을 한 거였구나. 그래서 애한테 그 소름끼치는 걸 물려준 거야?
남편은 약봉지를 보고 놀랐다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걸 옆에서 들었다. 이 여자가 이상한 게 아니라 병이 있는 거였어? 싶었다고. 맞다. 나는 10년이 넘도록 남편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유별나고 이상한 여자. 이상한 부모 밑에서 자라서 생각이 좀 이상한 여자. 그래서 신혼인데도 남편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제 멋대로 직장을 그만둬버리는 무서운 여자.
결혼 한 달 만에 일어난 그 사건이 만든 균열은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덮어지지도, 봉합되지도 못했다. 남편은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를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어차피 이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인데, 차라리 몰라야 할 일이 아니겠나. 안나 카레니나도 자신의 불륜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누이를 두고 같은 말을 한다. "만약 그녀가 내 입장을 용서할 수 없다면, 난 영원히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겠어요. 나를 용서하려면 그녀도 내가 살았던 삶을 살아야 할 테니까요. 신께서 그런 일에서 그녀를 지켜주시겠지요." 하나님도 남편을 그런 일에서 지켜주고 계신다.
나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는 상담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약으로 나을 거라고 말이다. 자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처방되었길래 "이거 먹고 죽을 수도 있나요?" 하고 물었다. 연세가 좀 있으신 선생님은 "한꺼번에 먹어도 안 죽어요. 안 죽으려고 온 거 아니예요?" 하며 웃었다. 맞다. 열심히 약을 먹었다. 처음에는 여덟 알쯤 되던 약이 점점 줄었다. 1년 가까이 됐을 때 선생님은, "이제 이거 먹고 괜찮으면 오지 않아도 돼요." 했다. 나는... 괜찮아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때는 자살이 지금처럼 문제가 크지 않았다. 자살유가족센터도, 광역정신보건센터도, 한참 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혼자 앓았어야 했던 거다.
아이들은 최근에서야 내가 약물치료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다. "엄마 우울증 약 먹었다고? 그렇게나 오래?" 하며 놀라길래, "응. 그래서 살았지 뭐. 너도 기억날 걸. 왜, 엄마가 소파에서 너 안고 자다가 소리 질러서 너 무섭다고 막 울었잖아."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약물 부작용으로 잠이 많아지고 잠꼬대가 심했던 때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나에게 딸이 와서 팔베게를 해주고 다시 잠이 들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꿈에서 누굴 불렀는지 화가 났는지 "야!"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게 잠꼬대로 고스란히 아이 귀에 대고 기합을 넣은 꼴이 되고 말았다. 아이가 우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어렴풋이 꿈 생각이 나면서 상황파악이 되었다. 아들도 놀라서 나에게 오고, 우는 아이들을 안고 달래며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전쟁같은 시간이었다. 안에서는 울지 못하고 앓지 못한 것들이 미어터지고, 겉으로는 정상이지 못해 죄스러워 해야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몇 번의 가출, 무기력, 강의를 하고 나면 더 깊어지는 자기혐오. 그 전쟁통에 내가 의지할 것은 아이들 뿐이었다. 나의 전쟁을 모르면서도 나를 일으키고, 내 품에 안기고, 내 짐을 함께 지고, 엄마가 슬퍼하는 말이라고 짐작해서 한 번도 '외갓집', '외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나의 작은 위로자들 말이다.
지금은 눈물이 말랐는데, 글을 쓰자니 눈물이 났다. 그 시간을 기억하면 그 시간의 감정이 묻어나서 그런가보다. 이제 써버렸으니, 더이상 쓰지 않아도 되길. 다음엔 그냥 나도 읽기만 하면 마음이 다독여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