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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Jun 07. 2020

추억의 빈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아버지를 기억할 것이 별로 없다는, 추억의 빈곤이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는지, 무슨 노래를 즐겨 들으셨는지, 어떤 노후를 보내고 싶어 하셨는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김치를 담갔던 날, 손이 매워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엎드려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니 문득 엄마가 김치를 담그면 아버지가 새빨간 새 김치를 밥에 얹어 더 빨간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싹싹 비벼 드셨던 것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 날은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도 않고 오래도록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할 추억이 많은 사람들을, 나는 그래서 부러워한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의 추억들을 열심히 찾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버지의 옹이 굵은 손마디와 나무껍질 같은 새끼손톱, 나를 쿡 쥐어박으며 웃던 주름진 얼굴, 내가 두 걸음을 걸을 때 한 걸음씩 척척 내딛던 젊은 아버지의 구두... 아버지의 야윈 어깨를 주물러드렸던 손 끝의 감각이 떠올랐던 어느 밤, 나는 또 자다가 깨어서 식구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코를 막고 소리 없이 철철 울었다. 몸의 기억은 무엇보다도 강했다.


아이들을 여태 부둥부둥하는 건 두려움이 섞인 집착 같은 거다. 언제든지 이 아이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아직도 한 번씩 나를 겁주는 공포감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 아이들을 안고, 볼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불안한 행복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제발 이 순간을 울면서 추억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함께 살아있음 그 자체로 이미 나는 더 바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함께 살아있지 못한 아버지를 파란 손끝으로 그리워한다.


왜 조금 더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왜 더 오래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지 못했을까. 아니, 왜 나는 아버지에게 피와 살이 있다는 것에 그토록 무심했을까. 아무 소용없는 한심한 회한을 주워섬긴다. 막상 해달라는 것도 못해줬던 주제에.


고등학교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몹시 주저하시면서 나를 작은 방으로 가만히 불렀다. 문을 닫으라고 하길래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내 손에 귀이개를 쥐어주면서 귀를 좀 봐달라는 거였다. 살면서 그런 귀는 처음 보았다. 그때는 아버지가 외항선을 타시던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귀 밖으로 돌기처럼 딱딱한 뿔이 삐죽 나와 있었다. 양쪽이 모두 그랬다. 내가 너무 놀라서 "아빠, 누워 봐." 하자, 아버지는 더 놀라서 아니라고, 그냥 보기만 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내가 귀이개를 그 뿔에 갖다 대자 아버지는 몸을 움찔하며 귀를 손으로 감쌌다. 됐다고, 괜찮다고 다시 귀이개를 뺏고 먼저 방을 나가셨다.


그 후로 나는 애써 아버지의 귀를 안 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그 아픈 귀를 해결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는 그 돌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 몸을 돌아볼 새가 없었던 몇 년이 지나고 손만 대도 귀 속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귀지가 굳어서 그렇다며 녹이는 약을 귀 안쪽에 발라주었다. 건드리면 많이 아프니 녹을 때까지 놔두라고 했다.


내게 귀를 봐달라고 했던 아버지의 병은 외로움이었다. 나 역시 내 몸을 외롭게 방치한 몇 년의 흔적은 아주 작은 알갱이로 떨어져 나왔다. 통증은 사라졌다. 아버지는 도대체 몇 년을 그렇게 외로웠던 거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거지? 가족이 넷이나 있는데 왜 아무도 몰랐던 걸까? 나는 뭘 했지?


아버지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평생 가족으로부터 아웃사이더이셨다. 내가 결혼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해 초에 양가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도 아버지는 식객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일이... 여기까지 왔는 줄은..." 하며 상 밑에서 떨리는 손을 마주 붙들고 계셨었다. 엄마는 끝내 아버지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지 못한 것을, 결혼식 때 아버지를 안아드리지 못한 것을, 우는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 그런 추억을 갖지 못한 손을.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 쥐어드리지 못한 내 아기들의 손을, 나는 뭐라고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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