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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Jun 07. 2020

아직, 생존 중입니다.

나를 치료해준 것은 분명 약이었다. 내 경우 어설픈 상담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간혹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병원을 찾아가고 약물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그러나 치료와는 별개로 내 삶에 산적한 숙제들은 나 말고는 해결할 사람이 없다. 우울증과 트라우마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내 삶에는 우울이 산적해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가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다니게 된 교회였다. 시댁은 오래전에 돌아가신 시 할머님부터 시작된 신앙이고, 당연히 교회에 나가야 하는 집안이었다. 열심히 다녔다. 교제하던 때부터 출석하고 교사도 하고 말이다.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하철 광고판에서 성경구절을 보았다.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고 나는 그 말씀을 붙들었다. 아버지는 열흘 뒤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자의 가족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없는' 존재다. 나를 위한 말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자살자는 유다, 예수를 판 자이다. 죽어 마땅한 자 아닌가. 자살은 죄이고,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걸로 끝이다. 나는 그 가족이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죽은 가족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망자를 위해 기도해도 되는 건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저희 아버지가 자살하셨거든요." 하면 몹시 당황하신다. 이제 그분들의 공허한 슬픈 표정이 너무 지친다.


나의 신앙고백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나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을 리 없다. 내 아이들을 지켜달라는 기도는 한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제발 뺏어가지 마세요."라는 두려움이다. 나의 신앙은 단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나를 구원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만 남아있을 뿐이다. 신앙고백 안에 나의 구원은,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틀어졌다. 나는 엄마와 동생들을 떠났고, 남편과도 껍데기만 남았다. 같은 일을 함께 겪었는데도 결코 함께 극복하지는 못했다. 새로 만난 사람들과도 벽이 있다. 어떤 친밀함이 형성되기 전에 꼭 그 사건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어쩌면 기본적으로 나의 인간관계에 가면이 씌워져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지금까지 내 혼돈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K 선생님과 J 둘 뿐이다. 내게는 귀한 사람들이다. '장완주의 친구'란 쉽게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질척이는 늪 같은 거다. 안다. 그래서 남은 친구들과의 관계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가 떠나 주었다. 그들 중에 아주 가끔씩 호기심인지, 생사 확인인지 전화를 하는 지인이 몇 있긴 하다.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고 끊는다. 이제 한 2년은 전화가 없을 것이다.


한 친구가 올해 초에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음이 여의하지 않더라도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라'는, 아주 정중하고 세심한 메시지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그 메시지가, '나는 예의를 갖췄으니, 너는 알아듣고 모임에 올 생각은 마라.'로 읽히는 건지 모르겠다. 유쾌하게 빙 둘러서 답을 했지만 나의 거절에 그들이 안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립지만 만나지 않는다. 그게 내가 그들에게 갖추는 예의이고 넘지 않는 선이다.




감정을 조절하는 호르몬이 조금 이상해진 듯하다. 눈물이 날 상황이 아닌데 눈물이 나곤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롯데월드에 놀러 가서 퍼레이드 쇼를 보며 울었던 적이 있다. 왜지?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천변을 산책하다가 저쪽 다리 밑에서 풍물패가 연습하는 걸 보고 한참 목이 메인 채로 서서 바라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다가 슬픈 장면이 아닌데, 내가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난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얼굴이 더 못생겨진다. 참, 너무하다.


새로운 '눈물'의 상황 중에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마른 노인의 뒷모습. 아버지의 시신을 못 본 죗값이다. '그때 수의를 입고 누워있던 왜소한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었을지 몰라' 하는, 나조차도 어이없는 의구심이다. 아닐 거라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살의 충동인 지 유혹인 지가 온다. 치료가 끝났다고 해서 이미 머릿속에 세운 자살 계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도발할 때 나는 아주 쉽게 무너져 버린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가 아이들인데 내가 필요치 않다면 굳이 살아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죽으려고 나갔던 적이 몇 번 있다.


"엄마, 집 안 나간다고 약속해."

"약속은 못 해. 나도 살아야지. 나한테도 너를 피할 곳이 필요해."

"그럼 핸드폰 끄지 않기로 약속해."

"응. 그건 할게. 그리고 내가 어디 가는지는 뻔하잖아. 엄마 죽지는 않을게."


내 손으로 나를 끝내지 않겠다고 아이들과 약속한 지 이제 겨우 2년이 되었다. 죽으려고 집을 나섰다가 오밤중에 찾아가서 계속 우는 바람에 밤새 한숨을 쉬며 들어주어야 하는 K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은 게 그쯤 된 거다. 여전히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그저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선생님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죽지는 않으려고요." 오랜만에 낮에 맨 정신으로 만난 선생님은 "그래, 그걸로 됐다." 하셨다.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모두가 만신창이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았다. 하나님이 뭐라 하시면 나는 대들 거다. "죽지 않았잖아요. 이렇게라도 살고 있잖아요. 저한테 뭘 더 원하시죠?"


나는 아직 생존 중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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