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후 13일째, 내가 소식을 들은 지 열흘 째 되던 날 새벽에 나는 꿈을 꾸었다. 내 결혼식 때 입었던 흐린 양복을 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긴, 그러나 울어서 얼굴이 울긋불긋한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어디선가 큰 흰 뱀 한 마리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는데 아버지는 그 뱀을 덥석 잡았다. 뱀이 몸을 뻣뻣하게 쭉 펴자 아버지는 힘주어 그 뱀을 뚝뚝 꺾어 접은 후 큰 플라스틱 통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그걸 옆구리에 끼고는 뒤를 돌아 문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각 이모도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 꿈에 아버지는 어느 무덤 옆에서 손짓으로 이모를 불렀다. 이모가 가까이 다가갔더니 손에 무슨 종이를 하나 쥐어주고는 뒤를 돌아 사라졌다고 했다. 그때 이모는 엄마와 함께 자고 있었다. 이모는 일어나서 엄마를 깨우고, 오늘은 무슨 소식이 있을 모양이라고 말해줬다 한다.
아버지는 그날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아침 일찍 인적이 드문 산길을 등산하던 사람이 산속 어느 무덤가에서 아버지를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모와 나의 꿈에 나타났던 그 시간이었나 보다. 열 사흘을 그곳에 맴돌다가 드디어 마음을 놓고 뒤돌아 갈 길을 가셨던 걸까. 나는 매일 악몽을 꾸던 참이라 그 꿈도 그런 거였겠거니 했다가 나중에 이모의 말을 듣고서야 무슨 꿈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후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건 늘 이상한 자세로 쓰러져 있거나 울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나는 깨어나서 뜬 눈으로 몇 시간씩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아버지 꿈을 꾸지 않는다. 십수 년 전의 꿈이 마지막이었고 그날의 꿈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나는 어느 언덕의 벤치에 앉아 있었던 듯하다. 저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이제 어떡하지." 누군가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야지."
살아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조용하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품위 있고 넉넉한 목소리... 늘 남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아버지가 나에게 낯선 목소리, 그러나 분명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살아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마치 아버지가 나와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또 내 결혼식 때 입었던 흐린 양복을 입고 계셨다. 어이없다. 평생 잠바만 입으셨던 분이다. 양복을 입을 일이란 정말 누구 결혼식뿐이었고, 그것도 3, 4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래서였나, 아버지는 내 결혼식에도 헌 양복을 입고 왔었다.
아버지는 내가 바라보던 먼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토록 편안한 모습이라니... 눈물자국은 이제 없었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득달같은 식구들 눈치를 보고, 손님들에게 90도로 절하고, 손님들에게 두들겨 맞고, 마지막에는 소송에 쫓기던 아버지다. 죽을 때까지 작았던 아버지는 아까의 그 목소리만큼이나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그게 전부다.
"나 이제 어떡하지..."
"살아야지."
그게 꿈에 만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더없이 평안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내 옆에 앉아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어서 아직도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마도 그래서 다시 오지 않는 것도 같다.
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냄새가 간혹 희미하게 스칠 때가 있다. 찰나의 순간,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느낌이다. 매번 똑같지도 않다. 아버지가 어느 시절엔가 쓰시던 스킨의 잔향인지, 입으시던 옷에 배인 체취인지 잘 모른다. 분명한 건 그 짧은 순간의 후각이 아버지를 소환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나의 의지적이고 논리적인 신앙을 접는다. 아버지가 곁에 계셨으면 좋겠고, 사실은 마음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확신한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곁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꿈에서처럼 아버지는 보이지 않지만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시는 듯하다. 대개는 아, 보고 계시는구나... 다녀 가시는구나... 하고 만다. 그러나 아주아주 가끔은 말도 한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테니 혼자 있을 때만 한다.
"나 살고 있어. 걱정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