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자일을 꿈꾸는 공무원

또라이 맞구나?!

by 장완주

중앙부처에 개방직 과장으로 가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IBM에도 있었고 여러 회사에서 IT기획을 꽤 오래 했던 경력이 있는 양반이다. 며칠 전에 카톡으로 "보고는 뭘로 받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한글. 가끔 파워포인트"라고 답을 주었더랬다.


"회의 말인데요. 툴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요?"

"야, 사람이 바뀌어야지. 툴 바꾼다고 변하지 않아."

"이 급변하는 시국에 HWP는 너무 적시성이 떨어지는데... ITS 들여오는 거 이상한가?"

"공무원 조직에서 회의를 없애는 건 정말 불가능해. 시장님 차관급인데 시스템 보세요 할 거야? 근데 현장 업무 효율을 높이는 차원이라면 나쁘지 않지.”


간만에 Y 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는데, 지금은 게임을 개발하는 IT기업에서 HR 업무를 하고 있다. 협업 툴은 뭘 쓰는지, 이슈 트래킹 시스템은 뭘 쓰는지, 애자일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ITS는 자체 개발해서 쓰는데, 일부 팀은 예전에 쓰던 아사나도 계속 쓰고 있어요."

"오~ 아사나 궁금했어요. 지라보다 가볍다며?"

"훨씬. 훨씬 가볍죠. 메신저는 잔디, 그리고 다른 건... 음... 스크럼 정도예요. 근데 차장님... 지금 공무원 아니세요?"

"맞아요. 이상하죠?"

"하하, 좀 신기해요."


그러게... 공무원이 애자일은 왜 묻는가 말이다.


부서 이동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고 원래 내 차례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덜컥 떠나게 되었다. 원래 있던 곳의 사람들과 그 업무에 너무나 깊은 집착(?)이 있었기에 헤어짐은 쉽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기 전날 저녁에 술을 먹고 얼마나 추하게 울었는지 모른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업무 인계는 그리 문제 되진 않았다. 매뉴얼 쓰는 게 취미라서 그동안 짬짬이 화면을 캡처하고 번호를 붙여놓은 것들이 있었다. 미처 쓰지 못한 건 수시로 들락거리며 알려주었다. 다행히 후임자는 나보다 침착하고 영민한, 좋은 사람이다. 나는 엑셀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그를 낚아 내 후임으로 앉혔다. 이제 내 업무는 안전하게 명맥을 이을 것이다.


새로 옮긴 부서는 회의 준비가 가장 큰 업무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문서작업만 하는 곳이다. 문서... 음... 그래, 그거야 뭐. 그런데 난관이 두 개 있었다. 첫 번째 난관은 전임자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거다. 센스 있고 일을 너무나 잘하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업무를 인계해줄 만한 평범한 두뇌를 갖고 있지 않다. 그에게 받은 업무 인수는 어떤 일을 언제쯤 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고, how-to는 없었으며 해당 업무의 폴더와 파일은 여기저기 여러 개 중복되어 흩어져 있었다. 천재가 전임자면 많이 곤란하다.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면 "그냥 하시면 돼요."라고 늘 말한다. 글쎄 그 '그냥'을 설명할 방법을 천재는 모른다.


두 번째 난관이 더 컸다. 바로 HWP를 회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HWP는 공무원과 학교만 쓴다. 물론 '공무원만 쓰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HWP는 문제다. 한갓 워드프로세서의 한 종류일 뿐인데 그게 뭐 그렇게 따지느냐고 묻는다면 "도구가 인간을 만든다."라고 답하겠다. HWP는 공무원의 능력과 문화를 만든다.


대학 때 운 좋게도 당대 석학이자 제1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내신 조 순 교수님께 경제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제도론 신봉자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회를 만든다." 하얀 머리와 하얀 눈썹에 신념이 가득한 얼굴로 힘주어 "인스티튜우션!" 하고 강조하시던 그 목소리 덕분인지, 나는 제도를 비롯한 환경과 도구를 독립변수로 보고 인간과 조직의 행동, 결정을 종속변수로 보는 제도론 모형 하나를 머릿속에 장착하고 있다. 모형은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인간은 여러 모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생각을 바꾸어도 안 되는 일들이 코로나 한 방에 바뀌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손을 자주 씻고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는 습관은 사람의 사고가 바뀌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전기차를 사는 이유는 환경을 보호해야겠다는 선하고 굳은 의지 때문이 아니라 보조금과 저렴한 전기요금이라는 유인정책, 즉 인스티튜션에 기인한 바다.


MS-Word, 아래한글, 훈민정음(들어는 봤나?), 일사천리(응?) 등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들이 중원을 놓고 겨룰 때 공무원 조직처럼 큰 단일 고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한국 소프트웨어 시장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산제품 중 하나에 힘을 실어주어야 했고, 그게 아래한글이었다. 그 후 일반 시장은 워드가 대세를 이루고 공무원과 학교, 공공기관은 HWP를 고집했는데,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HWP를 써서 문서작업을 해야 했다. IT 태동기, 그때는 맞았다. 그래서 HWP는 막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단일동질성을 기반으로 일사불란하게 치고 나가던 개발의 시대가 아니다. 다양성이 생명인 2020년 오늘, 파워풀하지만 확장성이 빈약한 HWP는 공무원 사회의 생산성뿐만 아니라 조직문화와 상황 대응력마저도 가로막는 적폐 그 자체다. 특히 모든 결과물의 공유인 회의가 그것으로만 이뤄지다 보니, 다른 프로그램들과 시스템들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길목을 HWP가 막고 있다. 왜 똑똑한 젊은이들이 그 어려운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돼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가. 단언컨대 HWP 때문이다. 엑셀로 계산하면 10초도 안 걸릴 것을 계산기 두드려서 HWP 보고 서식에 맞게 한 땀 한 땀 타이핑한다. 세미나에서 HWP로 발표자료 만들어서 보고 읽는 분들은 전부 공무원 아니면 교수님이었다.


사기업에서 일했던 나는 본능에 가깝게 능률성과 생산성을 따지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의 시각에서 봤을 때 HWP 회의는 최악이다. 자료를 취합하는 데에 드는 과도한 인력과 시간을 줄이면 공무원 업무는 반으로 줄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했더니 "그래서 HWP를 버릴 수가 없는 거야~"라는 참신한 해석을 누군가가 주었다!) 취합 자료를 '앉은 채로 보면서 읽는' 방식의 회의(도구의 기능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해당 회의 결과 전파와 팔로업의 일방향적 한계 등은 매일 급변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국에 정말 유효한 것인가? 확진자 통계도 HWP에 한 땀 한 땀 적으시려고? 나는 아무래도 Yes라고 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 모든 인내심과 전략을 동원해 애자일의 도입을 시도하려 한다. 회의업무를 담당하자마자 회의를 없앨 음모를 꾸미고 있다. 어릴 때처럼 돌직구 던지고 홈런 맞고 강판당하는 애송이는 아니지만 여전히 밀당에 소질이 없어서 이런 내 생각이 먹힐 지 심히 불안하다. 2년은 공들여볼 생각이다. 그동안 군불 때고 아웃풋 내기까지 내가 정말 견딜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자신은 없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모두가 똑같은 프로그램을 쓰고 똑같은 서식을 쓰는' 환경은 이 엄청나게 다양한 자극을 견뎌내지 못한다. 어느 블로거의 글에는 웹브라우저를 두 개 이상 쓰는 사람의 문제 해결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다고 쓰여 있었다. 매우 동의한다. 공무원 조직의 보고서는 아주 미약한 형식적 다양성에도 '낯설어서 이해가 안 된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그걸로 계속 정체되건 말건 상관없으면 좋겠는데, 공무원이 계속 그렇게 가면 이 나라는 망한다. 4차 산업혁명이 코 앞이다. 그런데 판을 짜줘야 하는 공무원이 이토록 관료제적 회의와 일률적인 보고에 매몰되어 보고서를 몇 번씩 물리고 의사결정을 뭉개고 있으면 정말이다, 한국은 망한다.


가장 덜 아프게 주사를 놓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변화는 뭔가를 포기하고 버리는 과정이다. 달콤한 변화는 없다. 사람은 변화를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도 잘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조직 구성원의 '생각'을 변화시킬 의도가 전혀 없다. 어차피 환경이 바뀌면 생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인지부조화 상황에서의 자기합리화라는 아름다운 변화의 여정이 있다.


혹시 어딘가에서 변화의 주파수를 쏘아올리는 공무원이 계시다면 노하우를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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