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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with. h선생님)

브런치 작가가 된 지 100일이 되었네요.

by 디엔드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연재를 쉬어간다는 글을 올렸는데, 갑자기 글이 올라와서 놀라셨죠? 다름이 아니라 오늘이 제가 브런치 작가가 된 지 100일째 되는 날이더라고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을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 글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진심을 담아서 글을 썼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많이 아팠지만 용기를 내서 공유한 경험이 다시 브런치를 찾아오게 만들고, 그게 어떤 방향이든 간에 독자님들 마음에 작은 울림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 독자님께서 이런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디엔드 님의 글은,

디엔드 님의 고통이 글로 승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영혼을 울리는 언어의 연금술사예요.

저 또한 작가님께 마음으로 큰 빚을 지고 있네요~


고통이 글로 승화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언어의 연금술사.


처음 들어보는 문장이기도 했고, 제 브런치에 대한 정체성이 나타나는 문장인 것 같아서 한참을 생각했어요.

‘나는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우선, 디엔드 작가에 대한 발전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저만의 강점은 '나만의 이야기가 명확하고, 완성형 인간이 아니라 진행형 인간'이라는 점이었어요. 청춘은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내년이면 성인이 되네요. 시간에 이끌려 정신을 놓고 지내다 보니, '벌써'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요.


이 공간에선,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의 단단함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쓴 글과 앞으로 쓸 글은 독자님들의 댓글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요. 혼자였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 주셔서, 작품이 되는 이야기를 완성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외로웠던 길을 함께 걸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독자님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지내요. '나는 디엔드 작가의 독자라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디엔드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앞으로도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 '어떤 순간에서도 널 응원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만약에 독자의 시선으로 댓글을 남긴다면, 전 이렇게 남겼을 거 같아요.


"당신의 세계가 궁금해요. 그 색채를 알고 싶고 어떤 지향점을 품었는지도요. 좀 더 알고 싶고 그 세계를 함께 탐험하고 싶어요. 아픔 속에서 버텨내는 강인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모든 걸 함축해서 저는 앞으로도 빛날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러니, 살아가요."


사실은,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누군가는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응원한다는 건 정말 온기가 가득한 일이더라고요. 제가 받은 그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당신의 하루에도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길 바라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25년 2월 9일에 어떤 계기로 다시 한번 더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낼 용기와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기를!




25년 2월 9일 일요일.


오전에 연재를 쉬어간다는 글을 끝으로 다짐을 했다. 오늘 죽겠다는 것을.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돌이켜 보니 정말 복합적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아는 언니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그 당시의 내가 붙잡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었던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단약 부작용 때문에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매일 구토와 불면을 반복했고, 다시 시작하는 공부와 학원에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고, 부정적인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죽음으로 도출될 뿐이다.


/


그러나, 마지막으로 꼭 봐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h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은 힘들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자 내 상태를 정말 객관적으로 바라봐주는 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선생님이라서 벌써 7년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의미가 있고 조금 특별한 관계라는 생각도 든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랑도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데, 초등학교 때 대회로 알게 된 선생님이랑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 인생에 불행이 닥친 날, 비 오던 날에 무작정 h선생님께 연락을 해서 교실에 찾아갔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는데, 연락처를 보다가 그냥 문득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제대로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는데 뭔가 이 선생님이라면 이해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함께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본 선생님은, 지금까지 봤던 어른과는 달랐다. 성장을 추구하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멋진 어른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그렇게 교실에 가서 지금까지 겪어온 일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자꾸 눈물이 흘렀다. 그 이후엔, 선생님께선 저녁을 사주셨다. 바닷가 근처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파스타 가게였는데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고통 속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일주일 만에 먹은 첫끼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몇 년 뒤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혼자 찾아갔었는데, 외관은 그대로였지만 카페 겸 술집으로 변해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엔 바닷가 근처를 계속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때 처음으로 Give and Take라는 책에 나오는 기버, 매처, 테이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요즘도 서점에 가면 이 책이 종종 보이는데 그 당시의 상황이 그려진다. 나는 그 이후로 Giver(남을 위해 내 것을 내어주는 사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것보단, 타인을 위한 미소와 친절, 그리고 다정한 말이 그 사람의 가치를 조금 더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도 기버가 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형태로든, give는 나에게 좋은 영향으로 돌아온다. (단, 때때로 세상은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음.)


/


이야기를 하고 나서, 집에 가기 위해 선생님 차에 탔을 때, 처음으로 펑펑 울어봤다. 힘들었는데,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티를 못 내고 혼자 아픔을 삼키고 있었다. 내가 비밀로 하면 우리 가족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울어도 돼.”라는 말을 그때 선생님을 통해 처음 들어봤던 거 같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울면 안 된다고 배웠다. 오죽하면 동요도 있지 않은가.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고, 산타할아버지는 누가 나쁜 아인지 착한 아인지 알고 계신다고 한다. 모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울고 싶을 땐, 슬플 땐 울어도 된다. 울어야 한다. 그게 오히려 건강한 감정해소 방법이다.




미성숙한 중학생 시절의 디엔드는 (사실 여전히 미성숙함.) 선생님께 아주 큰 신세를 많이 졌다. 새벽에 유서를 보내질 않나..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하질 않나.. 밤에 너무 힘든데 찾아와 주면 안 되겠냐고 하질 않나.. 그 당시의 어리광과 감정노동을 모두 받아준 선생님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h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이건 정말 확신한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그날의 선택이 어쩌면 내 삶을 바꾼 걸지도?


그 와중에도 독서, 명상, 운동, 기록에 대한 걸 꾸준히 해보라고 알려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책에 관심을 가졌고 파워 J(계획형)가 될 수 있었던 거 같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적으면, 할 말은 너무 많다. 인생을 게임으로 바라보라는 것, 슬럼프에 극복하는 법, 아픔을 수용하는 법,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경험을 통한 이야기..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 이야기들은 내 가치관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됐다.




아무튼, 다시 2025년 2월 9일로 돌아와서.


선생님은 타국에 있다가 며칠 전에 귀국을 하신 상태였고, 나는 결심을 내린 상태였다.


선생님께 연락을 하니, 짐정리도 안 됐고 정신도 없는 상황이라서 모레에 보자고 하셨지만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당장 몇 시간 뒤에라도 죽을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겠다고 얘기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전에 편지를 썼는데, 쓰는 내내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집에선 불효녀, 선생님껜 나쁜 제자가 된 것 같은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프다.


선생님 집에 가기 전에, 마카롱과 마트리카리아(캐모마일) 꽃을 샀다. 캐모마일의 꽃말은 “역경에 굴하지 않은 강인함”이다. 그냥 이 꽃이 나보다 나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부럽다.


거의 2~3년 만에 선생님을 만났고, 아내 분도 처음으로 뵀다. 첫인상을 보자마자 딱 느껴졌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구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한 긍정에너지가 느껴져서 쌤이 결혼을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ㅋㅋ


그리고 4년 전쯤에 미니 대나무처럼 생긴 개운죽을 선물로 드린 적이 있었는데, 엄청 많이 컸다며 보여주셨다. 그걸 아직까지 가지고 계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엄청 성장해서 단단해진 개운죽을 보니 ‘너도, 나도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다.




밥을 먹으며 여러 얘기를 나눴는데, 사실 초반에는 자리를 빨리 뜨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선물이랑 편지만 전해주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이야기를 하면, 나의 감정이 전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밥 안 먹으면 안 보내주겠다는 말에 강제로 좀 앉아있긴 했는데, 괜찮은 척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근데 선생님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신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나 보다. 내가 멍청한 건지, 선생님이 눈치가 빠른 건지. 아마도 둘 다일 거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식탁에 둔 편지를 잽싸게 들어서 읽었다. 사실 편지를 전하는 게 목적이긴 했는데, 이건 가기 전에 드리려고 했던 거였다. 편지 내용은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말.. 뭐 그런 거다. 실랑이를 하며 편지를 못 읽게 했는데, 내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매우 부끄럽고 죄송하고 오만감정이 다 들었다. 으아..)


결국엔 모든 걸 다 얘기하게 됐다. 사실은 들킨 거지만.. 차마 뭘 들킨 건지는 못 쓰겠다. 혹시나 따라 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을 거 같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브런치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내가 얼마나 이 공간을 애정하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죽는다면,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슬프겠지. 근데 너는 브런치에서도 너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진심으로 댓글을 남겨주고 있는데, 만약 네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어떨지 생각해 봤어?"


할 말이 없었다.


그 이후에 선생님은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주셨다.

https://brunch.co.kr/@time-limit/67#comments

"작가님 글 기다리고 있을게요. 밝은 글이든, 어두운 글이든 다시 읽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기다릴게요. 그리고 작가님의 매일을 응원하겠습니다."

"너무 바르게, 너무 괜찮은 척 살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해요. 그것보다 그냥 지금처럼 따뜻한 글을 계속 올려줘요. 당신이 내어주는 이야기가 꼭 즐겁지 않아도,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 있어요."

"작가님의 연재가 재개되길 온 마음을 담아 응원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글은 항상 밝은 빛이었다는 거 기억해 주세요!!"


내가 뭐라고.. 정말 나 따위가 뭐라고.. 사실 댓글을 읽고 집에서 혼자 정말 많이 울었다. 존재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찢어진 마음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기분이랄까. 이 상처가 언제 아물진 몰라도, 치료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좋은 사람이 너무 많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용기를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 댓글들을 읽고, 이븐도 작가님의 소개글이 생각났다. "당신과 나의 스테이블을 바랍니다."


위로는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가장 잘 건넬 수 있다. 어떤 삶을 살아온 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들의 삶에서도 크고 작은 아픔들이 있었기에 나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저렇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과 나의 스테이블이 지속되기를.




선생님과의 만남을 끝낸 이후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고된 삶이었으니 이젠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내가 죽기 위한 조건(?)에 대해 만들어주셨다.


“네가 정말로 죽고 싶다면, 일단 의대 합격해. 그때도 죽고 싶다고 하면 ‘이건 고집이 아니라 진심이구나.’ 하면서 인정할게.”


그 이후에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대신에 앞으로 6개월 동안은, 매일 공부 인증해야 돼. 하루라도 안 하면 (비밀) 엄마한테 말한다!”


/



뭐.. 그렇게 됐다. 사실 난 여전히 살아가는 게 두려운 것 같다.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을 반복한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지금까지 이룬 건 없고, 마음은 아프고, 세상은 어둡고, 살아야 하는 이유보단 죽어야 하는 이유가 더 많은 거 같지만.. 또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생겼다. 삶을 영위하는 행위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꽤 고통스럽긴 한데,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생각하고 지내보려고 한다.


https://brunch.co.kr/@time-limit/57

요즘은 매일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다. 아파봤기에, 이 직업에 대한 의미를 더 잘 알고 있다. 부디, 희망을 주겠다고 했던 그날의 마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청춘은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동시에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살길 바란다.

- 작년, 재수학원에서 쓴 일기 中





h선생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모든 대화에서 공통된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살길 바란다는 것’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긍정적인 신호들을 알려주셨고, 진심이 느껴졌다.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정말 싫었기에, 타인도 당연히 나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을 가기 전에, 선생님은 나를 붙잡고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마음 덕에 나는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던 거 같다. ‘살만한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이 오는 날이 나에게도 있겠지?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본다.






“근데 나 눈치 진짜 빠르지 않아?”

“쌤은 교사가 아니라 형사 해야 할 거 같아요!”






그렇게 또다시 삶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제 이야기를 동행해 주신 260여 명의 독자님들 덕에 저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어요. 처음으로 너무 감사하고 따뜻해서 울어보기도 했고, 응원 수익으로 저에게 좋은 책 몇 권을 선물하기도 했고, 감사일기에 쓸 말이 없었는데 이젠 빼곡히 채울 정도도 됐고요.


덕분에 다정함을 배웠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감사하다는 말 밖에 전할 수가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 그리고 5년을 넘게 흑백 세상에서 살아온 기분이었는데, 작년을 기준으로 저의 세상에 조금씩 색이 더해지고 있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 몇몇 덕에 또 살아가는 거겠죠? 우리의 매일이 조금 더 다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행을 눌러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편안하고, 미소 짓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세요.


- 디엔드 올림.




p.s. 다음 글은 28일에 "2월 회고" 글이 올라갑니다. 2월의 끝자락에서 만나요! 그동안 주어진 삶을 열심히, 아니 꾸준히 살아볼게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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