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쇼핑

by 라일락


2층 병원은 비밀처럼 숨겨져 있다. 병원은 흡사 동물농장 같다. 사슴과 고라니 같은 눈망울을 한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앉아 있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왔을까’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1층은 쇼핑몰이다. 욕망의 눈길들이 오가는 판매대 가운데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면 병원이 나온다. 2층 사슴들의 눈에는 욕망이 가득하지 않다. 없진 않지만 바람빠진 풍선처럼 이따금씩 휘휘 흔들릴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표정은 대개 순해 보인다.


간호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순한 눈길이 한 곳으로 모였다 흩어진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병원은 줄이 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목만 길어질 뿐이다.


진료는 3분이면 끝난다.

“지난 번에 드린 약은 어땠나요?”

“낮에 일하는데 너무 졸렸어요.

“그럼 하얀 약은 반으로 줄여드릴게요. 2주 후에 또 오세요.”

“네.”


얌전히 나와 소파에 앉는다. 옆에 앉은 중년 여자는 속삭이듯 통화한다.

“으응, 언니. 나 병원에 왔지. 그 병원. 금방 갈거야. 응, 알았어.”

한 때는 미혹되었던 사람들. 들끓고 분통 터지고 가슴 싸한 통증이 이마를 훑고 지나갔을 사람들. 지금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 없기를. 불안과 우울, 허무함을 느끼지 않고 제때 잠들기만을 바랄 뿐.


대학교를 갓 들어간 듯한 저 이는 사랑을 믿었을까. 저 남자는 일에 지쳐 나가 떨어졌나.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양복 차림의 사내는 돈에 배신당했을까. 간호사의 부름을 기다리는 사슴의 눈이 바빠진다.


간호사가 또 한 번 이름을 부르면 카운터로 간다. 진료비를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는다. 병원 옆 약국의 약사는 동그랗고 각진 약의 이름과 효능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더니 그런다.

하루에 한 번 걷고, 오후에 햇빛 쬐고, 세 끼 잘 먹으면 이런 약 하나도 안 먹어도 돼요.

그렇게 되고 싶어서 약을 먹는다는 말 대신 눈으로 웃어 보인다.


병원에서 1층으로 곧장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없다. 무거운 철문을 당겨 열고, 비상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약 봉투를 가방 안에 넣고 쇼핑객 행세를 한다. 다 똑같아 보이는 옷들 사이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찾으려 애쓴다. 거울 대신 벽에 그려진 포스터 속 모델을 보며 옷을 고른다.


오늘은 뭔가가 사고 싶어질까. 엄마처럼 어르고 달랜다. ‘이걸 사서 뭐해’ 그러면 ‘이거 입고 놀러 가자’고. ‘어울리지도 않을 게 뻔해’ 그러면 ‘한번 입어보기나 하자’고.


한없이 지하로 이어지는 머릿속 비상계단에 더는 발을 딛지 않도록. 생각의 쇼핑몰에서 길을 잃고 2층 구석으로 올라가, 잃은 게 많은 사슴들과 다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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