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가훈은 두 문장이었다.
정직한 마음을 갖자.
웃음을 생활화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두 문장 사이의 긴장감이 엄청나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다면, 어떻게 시도 때도 없이 웃을 수 있을까. 20년 가량 되는 독재의 기억이 남긴 ‘정직’과 ‘웃음’의 의미는 그 이질감을 인식할 새도 없이 가정으로 스며들었다.
아빠에게, 엄마에게 나는 인형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는데 그만 차 안에서 눈물이 났다. 기억 나진 않지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눈물을 보이는 순간, 아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아빠는 “잘 먹고, 잘 자고, 학교도 멀쩡히 다니는 애가 울 일이 뭐가 있냐”고 소리쳤고, 아빠가 소리칠 때마다 나는 침을 넘어 삼키며 울음을 참았다. 위장으로 넘어 온 눈물은 구토만큼이나 구역질이 났다.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엄마의 분노 버튼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체르니를 치고, 대구의 음악대회에 나가게 된 나를 엄마는 자랑하고 싶어했다. 엄마의 친구들을 불러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게 한 것이다. 당황한 나는 끝까지 피아노를 치지 않았고, 엄마의 친구들이 떠난 후 매를 맞았다. 내가 칠 연주곡이 실린 악보집을 둘둘 말아, 엄마는 내 엉덩이를 때렸다. 그 이후, 누가 오든 나는 피아노에 앉자마자 같은 곡을 연주해야 했다. 사람들의 칭찬이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내가 자고 있을 때나 울고 있을 때, 아빠의 대처방법은 하나였다. 머리 끝까지 올린 이불을 걷어내는 것. 그때의 수치를 기억한다. 하루 아침에 내 세계를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로 광장에 서는 기분.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꿈을 자주 꾼다. 집에서 나를 가려주던 이불이 사라지면 용수철처럼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눈물 대신 콧물을 흘려야 했기 때문에, 코를 푸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면 다시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우리집 가훈이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나서는, 아빠가 그 독재정권 아래서 직장을 얻고, 집 살 돈을 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엄마가 실은 나보다 남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 이상 혼나지 않는다. 엄마도, 아빠도 나를 혼내지 않는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던 해, 메모장에 정신없이 무언가 갈겨쓰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아빠가 내게 해온 잘못의 목록이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메모장에 적은 내용을 또박또박 이야기한 후, 연락을 끊었다.
새해 첫 날, 6개월이 넘게 지나 전화한 딸에게 엄마아빠는 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뿐이었다. 6개월의 공백은 자연스럽게 잊혔고, 나는 부모를 용서했다. 엄마의 부모, 아빠의 부모에게도 씻을 수 없는 결점과 약점이 있었고, 그 밑에서 자란 그들 역시 상처받았을 테니까.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상처를 무방비 상태인 어린 내게 대물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미워했지만, 사랑한다고. 백화점에서 잘 다린 흰 셔츠를 보면, 꽃무늬 스카프를 보면 두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고. 소름 끼치게 좋은 곳에 가도,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나도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었다고. 더는 약해지지 말라고. 내가 애를 낳으면 손주 손을 잡고 어디로든 산책해달라고 청첩장 뒷면의 편지에 썼다.
결혼식 날,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선 아빠는 울었다. 사위를 안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혼주석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한복 소매로 자기 몫의 눈물을 닦았다. 미안함과 서운함과 후련함과 답답함이, 켜켜이 쌓였다.
엄마 전화가 오면, 심호흡한다. 몸은 괜찮냐, 감기는 안 걸렸냐, 저녁밥은 뭘 먹었냐, 지난번에 보낸 배즙은 잘 먹고 있냐… 모든 질문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한 방편이다. 피곤한 마음을 누르고 짧게 대답하며, 나도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빠와의 전화통화는 1분을 넘긴 적이 없다. 할 말만 하고, 끊는다. 그래도 전화하지 않으면 어깨가 작은 아빠의 마음이 더 작아진다. 통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화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나는 모른다. 더 이상 나는 부모의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 그저 10분 남짓 내킬 때마다 그들의 세계에 방문할 뿐이다.
모순된 두 단어가 자연스레 공존하고, 단단하고 차가웠던 그들의 세계는 낡아간다. 나에 대한 미안함이, 그들의 쇠약함이 더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단단하고 차갑게 안녕하기를, 손님이 된 딸은 바란다.
(20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