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by 라일락

#1

어린 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심연까지 파고 드는 기분이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 그들은 우리가 언어를 쓰며 잃어버린 많은 것을 아직까지 품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아이가 자라면서 성숙해진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것 같다. 완전한 태고의 존재인 아이는 인간의 삶을 살면서 점점 불완전해지는 건 아닐까.


#2

혼자 떠난 돗토리 여행. 공항에 내린 사람들은 모두 작은 기차역에서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린다.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열차가 막 떠난 후 도착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홀로 여행객 세 명. 숙소에 짐을 두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그중 한 여행객을 다시 만났다. 다음날, 근교도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똑같은 얼굴을 만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마음이 아린다. 내가 새로 태어나기 전,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큰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때의 감각을 기억해, 그리움을 갖는 걸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아 종이와 펜을 찾는다. 가방 안에서 펜은 찾았지만, 종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급한대로 관광안내도의 귀퉁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기억

내가 배 속에 심어졌을 때

물의 이야기 삼켰네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세상을 떠나갈지

한 순간에 알게 되었네


세상에 나온 후 엄마가 내게

세상의 말 가르쳐주었네

엄마 아빠 어부바

말문이 트일 때마다

물의 이야기 하나씩 잊혀져갔네


마침내 모든 이야기 모조리 잊고

겨우 일년 전 기억만

되풀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네

사람들은 겨우 그런 걸 기억이라 부르네


하지만 힘껏 들숨쉬며

물의 이야기 들이키던 감각만은

아직 몸에 남아

가끔 나는 놀라곤 하네

처음 와본 이곳이 너무도 익숙해서

처음 본 그 얼굴이 너무나 그리웠음에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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