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일락 Dec 19. 2021

그녀

그녀의 북토크에 초대받았다. 20년을 인터뷰어로 일하고 있는 그는, 처음으로 인터뷰이가 돼 보았다고 했다. 특유의 잔잔함이 깔린 목소리로 자신의 직업 이야기를 했고, 나는 덕질하는 팬마냥 그녀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겼다. 함께 한 인터뷰이 중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는 자기 자신의 밑바닥과 대면할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요. 그 친구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능력이요.”

그녀가 말했다.  


“자랑스러운 후배님, 어디 계신가요?”

고개를 숙였다. 얼렁뚱땅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고, 질의응답 시간이 왔다. 평소 이런 시간에 절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지만, 왠지 한 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손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는 자아를 찾으려고 회사를 그만뒀어요. 아무런 방해나 제약이 없을 때 제가 뭘할지가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잠밖에 안 자더라고요. ‘나의 자아는 잠인가?’ 싶었는데요…”

무대에서도,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세 분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 자의로 하고 싶어서 하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인터뷰이였던 스타트업 대표는 친구를 만나거나, 노래를 듣거나 부른다고 했다. 인터뷰어였던 뮤지션 겸 작가는 달리기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번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콘서트 와중에 함박눈이 내렸다. 기타 반주에 스타트업 대표와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음치라던 그녀는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선곡해, 또박또박 불렀다. 그녀의 노래를 끝으로 북콘서트는 끝이 났다.


끝나자마자 그녀는 나를 향해 달려와서는, 와락 안았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옆 건물에 있는 와인바로 들어갔다. 작년 이맘 때 함께 점심을 먹긴 했지만, 그마저도 다른 일행이 있던 자리였고 한 시간 남짓 얼굴만 본 게 다여서 마주 보고 앉는 일이 새삼스러웠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마감 있을 때는 쫓기듯 전날에 마감하고, 나머지 날은 그냥 자요. 저는 가만히 놔두면 제가 책 읽고 글 쓸 줄 알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더라고요. 저희 집 고양이보다 많이 자요.”


그녀를 만나면 늘 그랬듯 내 주변의 얘기를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요즘 유일하게 하고 싶어지는 게 있는데요. 아기를 갖고 싶어요.”

“왜?”

“....... 제가 요즘에 ‘왜’를 잘 생각 안 해요. 아기 갖고 싶다는 것도 준비 같은 거 하나도 없이 ‘닥치면 다 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에요.”

“우리 일락씨, 행복하구나. 굳이 ‘왜’를 묻지 않는 삶이 행복한 거지. 네가 행복해서 나도 행복하다.”

나를 ‘일락이’라고 부르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나를 ‘일락씨’라고 부른다. 그녀는 몇 번이나 “네가 행복해서 나도 행복하다”라는 말을 했다.


“10년 동안 일락씨가 나를 찾았을 때는 늘 코너에 몰려 있을 때였어. 가족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혈연으로 엮이진 않았지만, 나는 늘 일락씨한테 ‘내 아이’ 같다는 감정이 들어.”

그랬었나. 그랬었다. 늘 왈칵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나,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엉 울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였을 때, 그녀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한 번도 놀라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잔잔한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별 일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았다.


“아까 했던 말 취소해야겠네. 일락씨가 너무 많이 행복해져서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할 것 같아. 좋은 글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야 써지는데, 굉장히 안정되어 보여.”

“맞아요. 단편적으로 한 개씩은 써지는데, 쭉 써내려 가고 싶은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올해 새해에 책 한 권이 집으로 날아왔다.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라는 제목. 그러고 보니 늘 통화 끝에 그녀는 “일락씨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 난 못 하는데, 일락씨는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곤 했었지. 뒤엉킨 가족사도, 사회생활에서 겪는 위화감도 글로 풀어보라고.

일한다고 바빠서 책을 다 읽지 못했다. 그녀의 바람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쓸 수 없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나의 행복을 기뻐할까, 내가 글 쓸 수 없음을 아쉬워할까. 둘 다일 것 같다. 그녀의 두 가지 바람을 동시에 이루어줄 수는 없는 거겠지?


우리는 와인 한 잔 씩을 나누어 먹었다. 그녀의 집에서 와인 한 병씩을 먹던 어느 날을 추억하면서. 그날, 와인을 마시고 그녀는 곤드레밥을 해주었다. 갖가지 나물과 함께. 강원도에 계시는 친정 엄마가 주었다면서, 나에게 꼭 먹이고 싶다며 쌈까지 싸주었었다.


그녀가 계산을 하고, 눈 쌓인 거리로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나무와 의자를 사진으로 찍었다. 요즘은 사진으로 하루하루를 기록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드문드문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MBTI를 내가 맞히자 그녀는 신기해했고, 나는 ‘그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사실 내가 맞힌 MBTI는 이전의 것이라고, 팀장이 되면서 내향적인 본성은 외향적인 행동으로 가려지고, 이상 대신 현실을 좇게 되었다고도 했다. 지금은 MBTI의 모든 지표가 어정쩡하게 중간에 있다고도.

“가능성이 많으시네요” 하자, 크게 웃었다. 내가 먼저 내리고, 카톡으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그녀와는 또 오랫 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소식 있으면 또 덕질하러 갈게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카톡 대화가 끝났다. 그러고도 오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늘의 대화 중 어떤 부분이 그녀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카톡을 너무 짧게 보낸 건 아닌가 내내 마음 쓰였다.

내게 건네준 선물가방 속 엽서에는 편지가 쓰여 있었다.


덜 외롭고 더 따스하고
덜 아프고 더 많이 웃는 날들이 많아지길…


편지는 이 두 줄로 끝났다. 편지를 식탁 위에 뒤집어두었다. 그 식탁 위에서 밥을 먹고, 일을 했다.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편지를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어 글을 쓴다.


                                                                                                                                                   (2021.12)

이전 05화 글쓰기 방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