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평생의 평화 같았던
사무실 의자에 앉자마자 가슴이 벌렁거렸다. 오래 전 나를 괴롭혔던 불안증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거였다. 불안 증상이 며칠이고 계속되던 날, 출근길에 봤던 간판 하나를 떠올렸다. 요가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뛰는 듯 요가원으로 향했다. 요가원 입구에서 차를 마시던 원장에게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가만히 있어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위아래로 하얀 면옷을 맞춰 입은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니까 불안한 거지요."
그 한마디에 갖고 있던 카드로 3개월을 결제했다. 붐비는 망원동 속 인도 같은 곳. 그 한가운데 홀로 섬처럼 떠 있던 간디와의 첫 만남이었다. (늘 그에겐 ‘원장님’이라고 불렀지만, 마음 속으로는 늘 그를 ‘간디’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팀원들과 점심을 먹는 대신 요가원에 가겠다고 선언한 후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그 곳을 찾았다. 가정집을 개조한 공간. 요가수업이 열리는 거실에는 연둣빛 요가매트가 열 장 정도 깔려 있었다. 거실 옆에 있는 큰 방은 탈의실. 원목으로 짠 수납장에 나뭇가지 색 종이가방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가방에는 수강생의 이름이 간디의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내 몫의 가방을 찾아 가방 안에 옷을 넣고, 챙겨 온 요가복을 입으면 준비 끝. 손을 씻고 거실로 나오면 양반다리를 하고 고요히 앉아 있는 간디가 보였다.
모두가 매트 위에 앉으면 간디가 싱잉볼을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아랫배까지 공기를 가득 채우고, 내뱉었다. 요가 매트 위에 앉아 있으면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고 온 회사 일도, 골치 아픈 온갖 걱정도 소용 없었다. 이 요가매트 위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 그저 천천히 숨 쉬며 간디를 따라했다.
‘푸우’, ‘꺼억’
수업 중에는 우리 몸의 많은 구멍에서 공기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는데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간디가 “몸에서 공기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 후로는 어떤 소리를 들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게 제일 어려웠던 자세는 쟁기자세.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에서 다리를 머리 위로 차 올리는 자세였다. 몸 전체가 뒤로 기우뚱 하고 넘어가는 기분. 처음에는 담요와 간디의 도움을 받아, 나중에는 혼자 배 힘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세는 그날 하루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나만의 기준이었는데, 스트레스가 많거나 잠을 제대로 못 잔 날이면 다리를 뒤로 차 올릴 때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반대로 몸이 가뿐한 날은 ‘요즘 꽤 잘 지내고 있네?’ 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누운 자세에서 목을 뒤로 꺾어 기도를 여는 물고기자세는 신비로웠다. 눈을 감고 가슴을 힘껏 열어 젖히면 하루 종일 맡았던 온갖 냄새가 목구멍과 콧구멍으로 올라왔다. 어느 날은 며칠 전에 급하게 먹었던 밥냄새를 맡기도 했다. 증기를 배출하는 밥솥이 된 것처럼 코로 숨을 뿜어냈다.
그 무렵, 나는 원인 모를 두드러기에 시달렸다. 일을 하다가도, TV를 보거나 잠을 자다가도 불현듯 한기와 함께 척추를 타고 주먹 만한 두드러기가 돋았다. 두드러기가 심한 날이면 반차를 쓰고 집에서 꼼짝 않고 누워 쉬어야 했다. 병원에서는 매번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해주었지만, 병원 약은 급한 불을 끌 때만 도움이 되었을 뿐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았다.
요가수업이 끝나고 포도송이마냥 두드러기가 돋은 날, 간디에게 몸에 난 두드러기를 보여주었다.
“몸을 움직이니까 나쁜 에너지가 올라오는 거예요. 그냥 놔두세요. 저절로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껏 누구도 두드러기에게 가만히 두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난생 처음 위로받은 두드러기는 차츰차츰 출몰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며칠이 지나자 내 몸에서 완전히 떠났다.
장맛비가 내리던 날은 소리명상을 했다. 거실 창문을 열고 모두가 누워 빗소리에 집중했다. 그 다음에는 빗소리를 제외한 다른 소리에만 집중했다. 비에 집중하면 비만 들렸고, 다른 것에 집중하면 다른 것만 들렸다.
책으로 남기고 싶지만, 책 속에 담기지 않을 것 같은 말이 있다. 간디의 말이 그랬다. “바꿀 수 없는 건 흘려버리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구름이 떠가는 것처럼 생각을 바라보세요. 절대 붙잡지는 않습니다” “자세를 할 때 몸이 아픈 곳으로 숨을 보내보세요. 알아주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같은 말들. 수업 내내 기억해두었다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지만, 적어둔 말은 이 빠진 그릇처럼 매번 어딘가 모자랐다. 그의 말은 바람구두를 신은 듯 자유롭게 움직일 때만 의미를 가졌다.
2월, 간디가 인도로 수행을 떠나고 그의 문하생들이 요가를 가르쳤다. 요가원에는 누가 봐도 다닌 지 아주 오래된 듯한 수강생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과 나의 차이는 옷차림에서부터 드러났다. 펑퍼짐한 티셔츠에 검정색 쫄바지를 입은 나와 달리 그들은 흰색, 남색, 빨간색 등 여러 색깔로 위아래를 맞춘 옷을 입고 요가를 했다. 간디의 것과 같은 옷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탈의실에서 도시락을 들고 나와 주방에서 간디와 함께 먹었다. 그들의 점심식사에 몇 번 초대받은 적이 있지만, 한사코 사양했다. 왠지 아직은 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인도에서 돌아온 간디는 요가수업을 문하생들에게 맡기고, 명상공부에 집중했다. 수강생들이 수업을 할 때면 주방의 티테이블에 앉아 흐뭇하게 모두를 바라보거나, 맨 뒷줄에서 열심히 동작을 따라했다. 문하생들의 수업을 들으며 간디의 수업이 사실은 강도가 센 운동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매번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기에, 나조차도 힘든 줄 모르고 동작을 따라했었다.
“요가는 운동이 아니에요.”
틈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요가원에 다니던 2년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안정된 시간이었다. 늘 가파르게 오르내렸던 마음이 균형을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벌벌 떨던 몸은 요가를 좋아하는 몸으로 천천히 바뀌어갔다. 기분이 좋은 날은 신나게, 몸이 뻐근한 날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요가원에 갔다. ‘며칠이나 가나 보자’며 농담하던 팀원들도 요가하는 나에게 익숙해졌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가거나 산책하는 팀원도 늘어났다.
우울증이 온 것 같다는 후배에게도, 잠을 잘 못 잔다는 디자이너에게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엄마에게도 요가를 처방했다. 월급이 들어오면 요가복을 사고, 요가책을 읽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요가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금세 가까워졌다. 요가와 가까워지던 어느 날, 간디와 이별하는 날이 다가왔다. 망원동이 아닌 다른 동네로 이직하게 된 것이다.
새 직장이 있던 을지로에도 요가원이 많았다. 하지만 요가원 어디에도 간디는 없었다. 여기는 너무 숨차게 운동만 시켜서, 저기는 왠지 학원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요가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결국 요가를 그만두었다. 나는 요가를 좋아한 게 아니라, 간디와의 수업시간을 좋아했던 거였다.
을지로의 직장을 그만두고도 당연히 요가를 시작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이사한 집 근처에도 요가원이 있었지만 거기는 인도가 아니었고, 당연히 간디도 없을 게 뻔했으니까. 다시 삐뚤어지고 뻣뻣해진 몸이 새 생명을 품었다.
“왼쪽 배만 자꾸 기분 나쁘게 아파요.”
내 말에 산부인과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골반이 한 쪽으로 틀어져서 그래요.”
불현듯 생각났다. 수업이 끝나고 나를 조용히 불러 몸의 오른쪽이 짧다고, 자꾸 움직이면 나아진다고 말했던 간디가. 쟁기자세를 하는 내 옆에 와서 이제 오른쪽 몸이 많이 늘어났다며 좋아하던 모습도. 5년이 지나, 내가 아닌 골반이 간디의 부재를 슬퍼하고 있었다.
망원동 요가원의 소식은 얼마 전, 그 동네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에게 들었다. 요가원이 있던 건물이 몽땅 사라졌다고. 요가원의 인터넷 카페에는 최근까지 명상수업 소식이 올라왔다. 회원이 아니어서 게시 글을 볼 수는 없었지만, 요가원이 사라져도 간디는 어딘가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짜 인도로 갔는지도.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영화를 보았다. 스무살에 친구 따라 다도를 시작한 여자와 스승의 이야기다. 마흔이 넘은 여자는 개의 모습이 그려진 다완을 다시 만난다. 12년에 한 번, 개띠 해 다회 날에만 꺼낼 수 있는 다완이다.
ⓒ 일일시호일
“12년이 또 지나면 나는 100살이겠네요.”
말하는 스승을 보며 간디와의 수업시간을 떠올렸다. 2년뿐이었지만, 내겐 평생의 평화 같았던 시간을. 잠시 꺼내 몇 번 닦고, 아끼는 다완을 대하듯 제자리에 넣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