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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Jun 13. 2024

다시 만난 요가

이제 저희 요가원도 조심스럽게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모든 수업은 예약제로 전환합니다. 수강을 원하시는 분들은 수업 전 날 정오까지 온라인으로 신청해주세요. 수업에 오실 때는 반드시 개인용 매트를 지참해주시고, 마스크를 꼭 착용해주세요. 다시 만나요.


1~2주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가 두세 달씩 길어지면서 닫혔던 회사 앞 요가원도 문을 열었다. 결혼식과 강연 같은 대규모 행사들이 그 몸집을 최대한으로 줄여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내 이름이 쓰인 요가매트를 들고 출근해, 점심시간이면 점심을 먹는 대신 요가원에 갔다. 이번 주는 다섯 명, 다음 주는 열 명, 그 다음 주는 집합 금지. 나라에서는 매주 다른 조치가 내려졌고, 우리도 나라의 소식에 귀 기울이며 조심조심 움직였다. 


입과 코를 가린 채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넓은 요가원 바닥에 띄엄띄엄 떨어져 앉았다. 마스크 사이로 뜨거운 들숨과 날숨을 쉬고, 수업이 끝나면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나마스테.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그 무렵,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바람과 달리 나는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마음의 평화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나를 자꾸 휘감았다. 내가 누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나는, 스스로 움직이고 멈추는 힘을 완전히 잃었다. 길을 걸어가면서 그냥 울었고, 일로 글을 쓰다가도 수시로 나가 울어야 다음 문장을 이을 수 있었다. 뜨거웠던 봄 어느 날 오후, 결국 회사를 놓아버렸고 회사 앞 요가원에는 영영 가지 못했다. 그곳에는 또 올 거라 생각하고 두었던 내 요가매트가 아직 있으려나. 3년이나 지났으니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맞겠다. 


집에 가져 온 요가매트의 사정도 비슷했다. 그해 여름 내내 열기 가득한 베란다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한낮에도 밤처럼 잠을 자고, 조여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약을 찾던 여름. 쇼핑몰에서 무엇이든 사고 싶어질까 기대하며 ‘이건 어때?’, ‘이건?’ 하고 스스로를 달래던 날들. 멀쩡히  숨 쉬고 있는 게 지상 최대 과제였던 그 계절에 요가는 잊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바뀐 후였다. 


새로운 직장이 된 우리집 근처에는 요가원이 없었다. 다른 동네도 사정은 비슷한 듯했다. 운동에도 분명 유행이 있다. 책 만들던 시절, 서점에 가면 한창 보이던 요가 관련 책들은 자취를 감췄다. 밖을 나서면 드문드문 보이던 요가원 간판 대신 눈에 띄는 건 필라테스 간판이었다. 모이는 건 불안, 떨어져 있는 게 곧 안전이던 시기. 개인이나 소그룹으로 할 수 있는 기구 필라테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가원을 찾지 못한 나도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했다. 작은방 만한 공간에 매트 두 개를 깔고 남편과 나란히 서서 운동을 했다.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세요.”

필라테스는 숨 쉬는 법부터 달랐다. 요가원에선 절대 입으로 숨을 쉬지 말라고 배웠다. 호흡에 입이 쓰이는 순간, 기가 풀려버린다고 했다. 요가는 정적인 운동 같지만, 몸을 비튼 상태로 가만히 있는 내내 몸 속 근육은 끊임없이 힘을 쓴다. 당기는 곳이 있으면 온 정신을 그곳에 두고, 아픈 곳으로 호흡을 보낸다. 내 기를 모은다. 입으로 한숨을 내쉬는 순간, 공중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모였던 힘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회원님, 졸리세요?”

선생님이 웃었다. 자세를 취하는 내내 감기는 눈꺼풀 때문이었다. 요가원에서는 자세에 집중할 때 눈을 감았다. 눈은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이기에, 눈을 뜨고 있으면 내 몸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눈을 감고 자세 안에 머무르세요.”

요가 선생님의 끝마디는 자주 이렇게 끝났고, 자세가 자리 잡았다 싶으면 스르르 눈을 감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 버릇은 자주 필라테스 선생님을 웃겼다. 


몸을 숙이는 자세를 할 때, 별안간 선생님이 다가와 내 등을 누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마에 세로선이 그어졌다. 요가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움직인다. 몸이 많이 숙여지거나 구부러지지 않아도 괜찮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자세를 취하고, 가만히 몸을 들여다본다.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라테스 선생님에게 요가 선생님처럼 나를 그냥  지켜봐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라테스에는 필라테스의 룰이 있었으니까. 그 룰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내 몸은 계속 요가를 찾았다. 


몸을 따라 나도 요가원을 찾아 헤맸다. 찾아낸 곳은 아파트 뒤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 GX 프로그램에 요가가 있었다. 요가시간은 아침 일곱 시와 저녁 일곱 시, 그리고 저녁 여덟 시. 아침 일곱 시는 아이가 깨는 시간, 저녁 여덟 시는 아이를 씻기고 재워야 하는 시간이기에 저녁 일곱 시 수업을 신청했다. 남편이 필라테스를 하고 오면 바통터치를 하듯 집을 나섰다. 이전에 그랬듯 내 몫의 매트를 들고 피트니스센터까지 달렸다. 빨리 달리면 일곱 시 직전에 GX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트를 펴고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면 음악과 함께 요가가 시작됐다. 


GX룸에는 커다란 전면거울이 있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엉거주춤한 나, 애쓰는 나를 마주 보게 됐다. 또다시 몸이 말하고 있었다. “원래 다니던 요가원에는 그냥 흰 벽이 있었는데” 하고. 안타깝게도 ‘원래 다니던 요가원’은 없어졌다. 속으로 간디라 부르며 따랐던 선생님은 옥천에 하얀 집을 짓고, 요가 대신 명상을 하신다. 그러니 ‘원래 다니던 요가원’ 타령은 그만하고 요가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움직이지 않았던 시간 동안 잔뜩 굳은 몸은 계속해서 뒤뚱거린다. 가만히 앉아 두 다리를 뻗기만 해도 파르르, 허벅지 안의 근육이 떨린다. 피트니스센터의 수강생들은 나보다 훨씬 더 오래된 학생들 같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떡이나 주전부리를 나눠 먹기도 한다. 그들에겐 여기가 ‘원래 요가원’일 테지. 기름칠한 듯 부드러운 그들의 몸선을 구경한다. 다시 내 몸으로 시선을 옮겨 애를 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를 위한 것이다.'


요가를 할 때는 가끔 이런 깨달음이 문장의 모양을 하고 이마에 꽂혔다. 옥천으로 떠난 간디 선생님은 그걸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자세를 할 때, 갑자기 어떤 기억이나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잠겨 있던 근육이 열리면서 불러온 거예요. 기억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거기에 파고들지 말고, 가만히 바라보세요. 바라보고 있으면 사라집니다.”

정말이었다. 불현듯 몇 년 전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갈 때가 있었다. 떠올리면 갑자기 화가 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는 길게 숨을 뱉어내면 기억은 희미해졌다. 떠올랐던 문장도 살을 모두 잃고 뼈대만 남았다. 뼈대만 남은 문장을 휴대폰 안에 주워 담았다. 서른 무렵의 휴대폰 메모장에는 그렇게 담은 문장이 더듬더듬 적혀 있다. 


요가는 나를 위한 것. 옆에 앉은 사람이 아무리 유연해도 소용 없다. 나는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몸을 움직일 뿐이다. 주위를 다시 나에게로 가져왔다. 나만 바라보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새로운 요가원의 선생님은 의욕과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다. 출산한 지 1년이 채 안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자세를 교정해주신다. ‘그냥 두셔도 되는데…’ 생각했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정말로 자세가 더 깊어지고 안 쓰이던 근육이 쓰인다. 그래서 고분고분 그를 따라 한다. 


“라일락님, 잘 따라 오고 계세요?”

맨 앞에서 자세를 가르치다가도 자주 물어보신다. 요가 선생님 눈에 나는 요가를 처음 만난 초심자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자세는 거의 다 잊어버렸고, 뻣뻣한 몸을 달래며 한 박자 늦게 끙끙 댄다.   

“요가에는 잘하고 못하는 게 없습니다. 내 몸을 존중해 주세요.”

간디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알까.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건네본 6년 전 수강생이 이토록 오랫 동안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미소는 늘 은은했던 그가 보고싶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그도, 요가도 다시 만나서 반갑다. 


지난 월요일에는 요가 인생 처음으로 머리서기자세를 했다. 사실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해주신 거지만. 벽 앞에 어깨 너비 만큼의 간격을 두고 블럭을 두 줄로 쌓는다. 그런 다음 블럭 위에 어깨를 올리고 벽을 향해 다리를 차올리면 힘을 쓰지 않고도 거꾸로 설 수 있다. 천장이 된 바닥에 금방이라도 붙을 듯 놓여 있는 정수리, 발 밑의 허공이 된 천장. 새로운 느낌이었다. 중력이 내 몸을 한껏 위로 끌어 올려주는 느낌. 


천장이 된 바닥 위에는 매트들이 떠 있었다. 고요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들 같았다. 그 중 눈에 띄는 연두색 배. 간디의 요가원에서 회사 앞 요가원으로, 우리집에서 새로운 요가원으로 온 나의 배. 나의 평화만큼이나 작은 조각배가 구석에 떠 있었다. 

“왼쪽에 쌓여 있는 매트 쓰시면 돼요.”

매번 매트를 이고 오는 나를 보고 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전 이게 좋아서…” 하고 말끝을 흐렸다. 


기어가는 자세를 할 때 손과 발을 놓는 위치에 줄이 그어져 있는 내 매트. 내 고양이의 스크래치가 가득한 내 매트. 너무 두껍지도 않고, 자세를 할 때 뒤로 밀리지도 않는 매트가 좋아서 고집스럽게 매트를 펼친다. 고집스러움. 그게 나였지. ‘물 같은 나’, ‘부드러운 나’가 아닌 ‘뾰족한 나’, ‘단단한 나’를 깨닫는다. 모난 돌 같은 내가 힘을 쓴다. 매트에 앉아 시간을 꼭꼭 씹어 삼킨다. 일주일에 세 번, 잘게 조각난 150분의 시간이 몸 구석구석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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