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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Nov 29. 2023

영원히

어릴 적, 이런 버튼이 있으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다. 누르면 지도에서 내 미래의 남편감이 있는 곳에 빨간 불빛이 켜지는 버튼. 어느 날은 버튼이 하나도 안 켜지면 어쩌나, 또 어느 날은 너무 여러 개가 켜지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 


대학교 땐 붉은 실 이야기에 매료되어 처음 보는 이들의 손 끝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손 끝에 붉은 실을 매달고 태어나며, 인연인 사람들은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 유심히 본다고 해서 보일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연이라면 내 눈엔 보이지 않을까 하면서. 


인연이라 생각했던 몇 번의 우연을 보내고, 내 실은 너무 엉켜 있어 주인을 찾지 못하는 건가 싶었을 때 내 앞에 나타난 한 사람. 그를 만나고 나서는 아득한 인연 같은 건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똑같이 좋으면 신나게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좋았고 지금도 여전히 좋다. 첫날과 둘째 날 그리고 오늘의 마음이 꼭 같은 무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같이 살게 된 후로는 매일 밤 잠든 그를 볼 수 있다.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하얀 도화지 같아서,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보게 된다. 어느 날은 어릴 적의 그를 그린다. 잠든 그의 손을 잡고 매일 학교와 집만 오가며 재밌는 것이라곤 방에 틀어 박혀 즐기는 게임뿐이었다던 그의 2000년대에 다녀온다. 그도 어린시절의 나처럼 아내가 될 사람을 궁금해했을까. 온통 먹다 남은 과자봉지뿐인 그 시절 그의 컴퓨터 책상 위엔 아내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여드름 가득한 소년의 이마를 잠시 쓸어주고 돌아온다. 좀 더 자라서 누나한테 오렴.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그와 내가 한 화면에 담기기 시작한다. 동아리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그는 연애뿐 아니라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깐 착각해 다른 일행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아무 감정 없이 두 눈을 꿈뻑일 뿐이었다. 구석 자리의 그에게 눈길이 머문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관심을 끌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저 말간 눈에 나를 담고 싶다고 불쑥 생각하고서는 오래도록 내 눈에 그를 담아두었다. 내 눈 속 그가 나를 바라볼 때까지. 


“우리 만날 때 말야. 결혼하고 애 낳고 같이 살게 될 줄 알았어?”

“응.”

“언제 알았어?”

“그건 몰라.”


그는 단정하듯 말하면서도 매번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 미술관에서 내 뒤로 성큼 다가와 “어두운데 뭐가 보여?” 하고 말 걸어주던 때였을까. 대학로에서 소주를 한 병씩 놓고 마시며 서로의 가정사를 이야기하던 밤이었을까. 나를 영영 잃을 뻔했던, 헤어지던 길이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 시절 그의 표정을 다시 읽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미래를 본 그의 표정을 만날 때까지. 


미래를 알게 된 그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대신,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눈동자 안에 나를 점점 더 안정적으로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물처럼 일렁거리던 눈동자는 딱 알맞은 깊이와 적절한 깜빡임으로 나를 비춰준다. 쉴 새 없이 흔들리던 나도 그의 눈 속에서라면 잔잔해져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재미 삼아 보러 간 사주카페에서 우리 둘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들은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손깍지를 꼈다. 자기의 손을 잘 보라고. 너희 둘은 이렇게 날 때부터 틈이 없이 이어져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때의 할아버지처럼 천천히 손깍지를 껴본다. 어긋나는 듯하던 열 손가락이 어느 순간 겹쳐지더니, 하나의 몸처럼 포개진다.


우리도 서서히 접점을 늘려가며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걸까. 너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너의 슬픔을 내가 서서히 가져오다 어느 순간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건가 생각하다 서서히 깍지를 푼다. 손가락 마디를 벗어나자 허공으로 흩어지듯 풀려버리는 깍지. 뗄 수 없는 하나였다가 아무것도 없던 것이 될 수도 있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연은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였는지 가늠할 수 없다. 언제까지일지도 알 수 없다. 다른 날 다른 곳에서 시작된 두 생이 어느 한 점에서 얽혔다. 얽혀서 생각지 못한 무늬도 되었다가 작은 조각도 만들었다. 앞으로 무엇이 될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미래를 읽을 줄 모르는 나는 잠든 그를 바라보다 잠이 든다. 내일 아침엔 또 어떤 그를 만나게 될까. 


너를 바라볼 때면
영원에 대해 생각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  
그 너머의 세상 말야 
아득히 오래 전
너와 내가 알았던 것처럼 

- 성시경, <영원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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