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중 그가 출근하는 이틀을 제외하고 우리는 늘 같이 있다. 같이 있을 때는 거의 서로 말을 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한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자기 전,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다. 하루종일 누가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야기가 고픈 사람들처럼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눈다. 하다 보면 재밌어서 잠 오는 것도 잊는다.
주로 내가 질문하고 그가 대답하는 패턴인데, 질문의 주제는 일정하지 않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무 질문이나 하면, 그는 대부분 성실하게 고민하고 대답해준다. 나와 전혀 다른 뇌구조를 지닌 그의 대답은 늘 뜻밖의 것이어서, 질문한 이를 긴장하게 한다. 그의 입술에서 대답이 나오기 전 몇 초. 그때의 긴장감이 늘 좋다. 고민하다가 ‘질문이 뭐 이런가’ 싶을 때는 질문이 이상해서 답을 할 수 없다고 항의를 해 오기도 하는데, 그런 항의 쯤이야 가볍게 무시하면 어떻게든 답을 도출해내야 하는 AI처럼 어떤 답이든 내려준다.
“다시 태어났는데, 네가 남자로 태어났어. 그런데 나도 남자로 태어났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좋은 친구로 지내겠지.”
이 질문은 신혼여행 날 밤에 던져봤는데, 적잖은 충격과 함께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럼 내가 여자라서 나랑 결혼한 거야?”
“그런 것도 있겠지.”
지금은 뭐, 다음 생에는 그와 친구로 만나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번 생에도 이미 그런 것 같다. 신혼여행 이후 그와 함께 간 모든 여행을 ‘우정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우린 제법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될 것이다. 진한 우정은 아니지만, 가끔 연락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걱정하는 심심한 우정을 나누게 될 것 같다.
“나랑 왜 결혼했어?”
“네가 구박받는 게 싫어서.”
이 질문은 결혼하고도 한참 후에야 물어봤다. 이렇게 기본적인 질문은 이상하게 건너뛰게 된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결혼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는데, 알겠다고만 했지 대체 왜 그랬는지는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나는 20대 후반에 결혼이 하고 싶었는데, 내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는 학생 신분으로 결혼할 수 없다며 버티던 그였다. 역시나 학생 신분이던 그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결혼 결심을 굳힌 건지 뒤늦게 알게 됐다.
단골 미용실에서 우연히 사촌동생을 만나 셋이 밥을 먹었는데, 내가 명절 때마다 본가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거였다. 그순간 ‘이런 이야기를 안 듣게 하려면 결혼을 해야 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내 기억에서는 완전히 잊혔지만 그에겐 특별한 날이었다.
“나랑 사귀면서 언제가 좋았어?”
“늘 좋았지.”
“차였을 때도 좋았어?”
“우씨.”
“그때 헤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느낌이도 없고 냠냠이도 없지.”
침대 밑 자기 자리에서 잠든 고양이와 배 속의 생명을 번갈아 한번씩 바라봤다. 갑자기 8년 전 그와 헤어지던 날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현재로 순간이동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처음 보는 고양이와 한 공간에 누워 있다. 내 배는 부르다. 그러자 시간이 준 선물처럼 고양이와 배 속 아이가 뿅 하고 생겨난 것 같았다. 그때 우리는 헤어짐 대신 서로를 선택했고, 그 결과로 두 생명이 우리 곁에 있다. 그의 답은 늘 한 마디지만, 나는 그 한 마디를 이렇게나 오래 곱씹는다. 곱씹다가 신나서 말을 걸면 어느 새 그는 꿈 속을 헤맨다. 다음 날 아침, 자기가 어젯밤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냠냠이야, 나야?”
“냠냠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대답이 이어진다.
“…품고 있는 너.”
우리는 서로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 됐다. 대학교 때 몇 번 나눈 손편지에서나 그는 ‘사랑해’라는 말을 마지막 줄에 써줬다. 그것 역시 그에겐 넓디 넓은 편지지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세 글자를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기뻤다. 그런 그에게 거의 10년 만에 받은 사랑 고백이었다. 두근두근.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
“임신해서 예전의 미모를 다 잃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거의 없어.”
고백의 순간에도 그는 변함없이 진실하다. 진실의 말을 던지고는 이내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잠든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그가 사랑했던 어린 나와, 그가 사랑하는 오늘의 나를 차례로 헤아려본다. 다음 밤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