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집 마당은 고양이들의 놀이터였다. 초등학생 무렵부터 나는 고양이 쫒는 기술을 익혔다. 눈을 부릅뜨고 “와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를 향해 달리면, 고양이는 흠칫 놀라며 도망 가곤 했다. 뒤를 돌아보면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양이는 밤이면 기분 나쁜 울음을 우는 존재, 이유는 잘 모르지만 없어야 편한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서른 무렵의 나는 네이버 고양이 카페에 있는 스코티쉬 폴드의 사진을 보며 집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에겐 인색했다. 초록색 눈망울을 보면, 밤에 마주칠까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고양이를 사지 않고 입양해야 한다’고 여러 번 힘주어 말했던 건 내가 좋아했던 직장 사수였다. 회사의 엄마 같은 존재였던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때쯤 법안이 바뀌면서 고양이를 판매하는 카페 게시판이 사라졌고, 펫숍에서 사는 게 아니면 품종묘를 데려올 수 없었다. 때마침 회사 선배가 망원동 방앗간에서 ‘고양이 입양’이라고 쓴 종이를 발견했고, 서른이 되던 해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흰색, 검은색, 갈색이 섞인 코리안숏헤어, 흔히 ‘길고양이’로 불리는 고양이였다.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전화로 처음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듣지 않아야 할 걸 들은 사람처럼 빽 소리를 질렀다. “어쩌려고!”
이내 진심을 꾹꾹 담아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책임지려고. 좋은 말할 때 얼른 제자리에 갖다놔. 너, 너는 진짜, 고양이가 어떤 동물인 줄 알고. 그냥 빨리 데려다놓으라고!” 엄마의 분노는 타는 불처럼 말을 거듭할수록 힘이 세졌다. 나도 “안 돼!”라고 맞불을 놓으며 고양이를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엄마가 찾아왔다. 몇 달에 한 번 서울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엄마는 아침 진료가 있는 날이면 우리집에서 자고 간다. 엄마가 집으로 들어오던 순간이 생생하다. 냥초딩 고양이는 현관까지 엄마와 나를 마중나왔고, 엄마는 존재감이 엄청난 ‘그 물체’를 최선을 다해 없는 양 행동했다. 고양이가 작은 방 안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녀도 아랑곳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제는 엄마가 옷을 갈아 입으러 복층으로 올라갔을 때 생겼다. 엄마가 궁금했던 고양이는 냉큼 엄마를 따라 복층으로 올라왔고, 고양이가 오는 게 싫었던 엄마는 무심결에 발로 고양이를 툭 밀어버렸다. 2킬로가 채 안 되는 작은 고양이는 그대로 발에 차여 계단을 굴렀다.
“엄마!!!!”
쌓여 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다 엄마 얼굴을 봤다. 엄마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머쓱해진 우리는 어색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전에 고양이를 놀아주고 있는데 엄마가 고양이와 나를 한참 바라봤다. “엄마도 한번 해볼래?” 손사래를 치는 엄마를 두고 씻고 나왔는데 엄마가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낚싯대를 흔들었다.
그날 이후, 전화통화를 하며 천연덕스럽게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도 엄마는 화내지 않았다. 피식 웃을 때도 많았다. 집에 올 때는 한참이나 고양이털을 청소하고 “고양이가 너무 크다”, “이제 그만 커야 되겠다”고 말했다. 엄마와 고양이가 종일 함께 있던 어느 날, 집에 엄마가 있단 걸 잊고 습관처럼 홈캠을 켰는데, 방바닥에 엄마가 모로 누워 있었다. 고양이가 엄마의 겨드랑이를 파고 들더니 엄마 곁에 누웠다. 할미와 고양이의 평화로운 낮잠이었다. 집에 와서 둘이 딱 붙어서 자는 걸 봤다고 하자 “가만히 있으니까 저게 딱 달라붙더라”라며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엄마는 고양이 할미가 되었다.
할미가 된 엄마는 영상통화를 좋아한다. 나랑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이내 고양이를 보여달라고 한다. 큰 소리로 고양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고, 어쩌다 고양이가 소리를 내면 더 크게 이름을 부른다. 집 마당에 고양이들이 와서 똥을 싸고 가도 이전처럼 고양이를 위협하는 일은 없다. 고양이 똥밭이 된 마당을 아침마다 묵묵히 치울 뿐이다. “고양이 못 키우겠거든 나 줘. 다른 고양이는 몰라도 느낌이는 내가 집 안에서 키워줄게” 한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지만.
우다다라곤 꿈도 꿀 수 없었던 7평짜리 오피스텔에서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 온 후, 고양이는 위풍당당해졌다. 엄마 말로는 이 집의 사장님 같다고 한다. 매일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자기 영역이 잘 있나 순찰하는 고양이가 엄마는 우습다. 엄마는 고양이에게 바짝 다가가 말을 건다. 영상통화를 할 때처럼 아주아주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위협을 느낀 고양이가 소리치면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엄마의 목소리도, 고양이 소리도 점점 커진다. 소리를 지르다 안 되면 엄마를 향해 하악질을 하기도 한다. 당장이라도 안 된다고 말리고 싶지만, 고양이를 좋아하는 엄마의 마음이 너무 진짜다. 고양이에게 속으로 할미랑 조금만 참고 놀아달라고 한다.
고양이와 엄마는 늘 조금씩 어긋난다. 엄마는 잘해주고 싶지만, 고양이는 부담스럽다. 엄마가 보이면 고양이는 빛의 속도로 이불 안으로 숨는다. 엄마는 고양이가 숨은 이불을 굳이굳이 들춰서 고양이를 혼낸다. “짐승이 사람 이불에 들어가면 안 되지! 요놈아!”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하다. 고양이 할미의 사랑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다 엄마가 가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푸욱 쉰다. 엄마가 왔다 가는 날이면 심신이 피곤했던 고양이는 이불 속에서 한참을 잔다. 그 마음을 알기에 깨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 쓰레기통에는 주먹만 한 고양이털이 뭉텅이로 버려져 있다. 엄마가 1박2일간 쉬지 않고 모은 결과물이다. 딸의 집에 온 엄마는 청소를 하러 온 사람처럼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곳곳을 쓸고 닦는다. 엄마가 오기 전에 아무리 열심히 청소를 해도, 청소하지 말라 따라다니며 말려도 소용 없다.
엄마가 모은 결과물에 감탄하며 집 안 곳곳을 살펴보다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을 발견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한 쪽만 방충망이 있어, 청소할 때는 그 쪽 문만 여는데 엄마가 깜빡한 모양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혹시 베란다문 열고 청소했어? 고양이는 방충망 없으면 그냥 뛰어내려. 뛰어내렸으면 어쩌려고.” 엄마는 금시초문이다. 한참 후, 엄마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
“창문이 열려 있었어? 엄마가 제대로 단속한다고 다 닫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네. 미안해, 딸. 다음부터 더 조심할게.”
“아니야, 엄마. 고양이 키우면 생각보다 조심해야 될 게 많아. 까먹을 수 있지. 나도 이것저것 자주 놓치고 깜빡해. 괜찮아 괜찮아.”
휴. 역시나 할미와 고양이는 둘만 둘 수 없다.
벌써 다섯 살이 되어버린 의젓한 고양이와 나이가 들수록 발랄해지는 할미는 그럼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늘 가슴을 졸이면서도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고양이 할미는 나의 엄마보다 100배는 더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