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일락 Feb 20. 2022

또다시 설렐 수 있을까

※성북구 책방 '부비프'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온라인 글방에 참여해 쓴 글입니다. 매주의 글감과 필자의 글, 짧은 모임 후기를 올립니다. 

글방은 4주 주기로 회원을 새로 모집한다. 네 번의 모임이 끝나면 새로운 사람들과 글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시원한 성격의 D님, 책방지기 E님과 모임을 함께하게 됐다. 첫 모임은 자유주제인데, 몇 주째 가라앉은 분위기의 글을 쓰다 보니 밝고 통통 튀는 글이 쓰고 싶었다. '내게 밝고 통통 튀는 경험이 뭘까' 생각하다가 덕질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간간이 나는 내 ‘애’들의 이름을 가끔씩 포털사이트에 쳐본다. 블로그를 뒤지다 보면 나와 비슷한 때 덕질을 시작해서 아직도 뜨거운 덕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은퇴한 덕후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덕후로 살던 2년은 가히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두 해로 기억된다. 


현역 덕후의 블로그에서 뒤로 자빠질 만한 희귀영상을 찾았다. 나의 차애와 최애가 나란히 라디오 게스트로 참여한 ‘보이는 라디오’ 영상이었다. 이 둘의 조합이라니. 2017년의 차애가 나라는 강을 건너 2019년의 최애에게 도착한 것 같았다. 공간을 초월한 두 사람, 아니 두 시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려 작년 9월의 영상이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이 영상의 존재를 깨닫게 된 나란 사람, 이젠 정말 은퇴한 덕후라 자칭해도 될 만하다. 


스물한 살의 그 ‘애’를 처음 만난 건 <프로듀스 101>에서였다. 사실, 그보다 몇 해 전 <K팝스타>에서 기타치는 그 ‘애’를 본 적이 있으나, 그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니 2017년, 그 해를 우리의 처음으로 해두는 게 맞겠다. 점심시간이면 조용히 포스트잇을 들고 지하철역에 갔다. 그 ‘애’의 사진이 붙은 전광판에 응원 메시지를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 ‘애’는 아쉽게 12위로 떨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려 솔로로 데뷔했다. 한 곡이 재생되는 한정된 시간을 다른 멤버와 나누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가끔씩 20대와 작별해야 하는 나와 이제 막 20대가 된 그 ‘애’의 나이차를 실감하며 죄책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이모뻘인 내가 이렇게 진심이어도 되나, 하고. 그애의 행복을 조용히 응원하는 이모가 되기로 결심하고, 내 몸을 불살랐다. 그 해는 셀 수 없는 스밍과 투표 로동으로 기억된다. 브이앱 라이브를 할 때면 하트를 누르느라 손가락에 경련이 올 것 같았다. 그래도 나의 신성한 로동이 그 ‘애’에게 힘이 된다면, 이모는 바랄 게 없었다. 


2017년 크리스마스, 그 ‘애’를 보러 대전에 갔다. 서울에서 티케팅에 실패하고, 바로 도전한 곳이 대전이었다. 스탠딩 좌석이었지만 괜찮았다. 오히려 더 좋았다. 여러 자리를 돌아다니며 그 ‘애’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테니까. 카메라 담당 남친을 데리고 콘서트장에 들어섰다. 그 ‘애’는 두 번째 순서였고, 암전이 되며 첫 번째 뮤지션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최애였던 그 ‘애’가 차애가 되어버린 때가.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커다란 체구에서 곧게 뻗어나온 목소리는 공연장을 한 바퀴 휘돌아 내 귀로 왔다. 내 자신이 신성해진 기분이었다. 과장을 좀 더 보태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달까.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얼굴이 허여멀건한 남자가 표정도 없이 목소리를 생성하고 있었다. 2019년까지 나를 들었다 놨다 한 최애였다. 


아이돌 덕질로 키운 멧집은 인디뮤지션 덕질에서 빛을 발했다. 경쟁률이 턱없이 낮았다. 포도알 게임을 스무 판만 해도 앞자리 티케팅에 성공할 수 있었고, 페스티벌이 많은 철이면 어렵지 않게 표를 구해 실물을 영접할 수 있었다. 빛보다 빠른 추진력으로 주위를 돌파하며 맨 앞줄에 설 수도 있었다. 흔하디 흔한 야광봉도 이 세계에선 희귀템이었다. 제작한 야광봉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엔 슬로건을 손에 들고 입을 헤 벌리고 있으면 노래하던 최애가 눈을 맞춰줬다. 차애의 공연장에서 팬들이 대열을 맞추느라 바빴다면, 최애의 공연장에선 팬들이 화장을 하느라 분주했다. 모두가 유사연애를 하러 온 듯했다. 최애가 내 눈을 바라보며 노래한다는 느낌, 그건 나만 갖는 느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뭐 어떤가. 어쨌든 착각의 순간 중 단 한 순간이라도 나와 진짜로 눈맞춤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합정역은 내게 추억의 장소였다. 물론 가상의 추억이었다. 최애가 사는 합정에는 그가 자주 들러 피아노를 치는 와인바, 그의 소속사가 있는 거리, 그가 종종 글을 쓰곤 하는 카페가 있었다. 일이 바쁘지 않은 날이면 반묶음에 원피스를 입고 합정엘 갔었다. 합정역 6번 출구 앞 길을 걸으며, 때로는 친구들과 와인바에서 열리는 문을 보며 최애와 마주치는 상상을 했다. 어쩐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2019년 12월 12일, 최애는 군대를 갔고, 나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마지막 라방을 마지막으로 그의 라이브는 들을 수 없었고, 때마침 터진 코로나19로 그를 오프에서 보는 일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때쯤,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최애와 차애의 노래를 잘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저 황홀하던 노래들이 언제부턴가 2% 부족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거리두기에 실패한 나머지, 나 자신에게 들이대던 높은 잣대를 두 ‘애’에게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쉴 때도 공부할 때도 나는 두 ‘애’ 대신, 그들과 친한 뮤지션들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애’를 그리워했다. 


*


영상은 중반부로 향해가고 있었다. 아이돌 6년차의 노련함으로 온갖 표정을 지으며 방송을 이끌어가는 차애가 있었고, 그 옆에는 세상 낯설다는 듯 멋쩍게 웃기만 하는 최애가 있었다. 


“우리 민석이 원래 엄청 재밌는 사람인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나왔다. 잔망미 넘치는 최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것이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다행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제대 후 최애의 신곡이 발표될 때마다 차트를 보는 게 두렵다. ‘제발 중간만 가라’ 하고 기도한다. 순위가 너무 낮으면 최애가 슬퍼할 테고, 너무 높으면 최애가 너무 유명해질까봐. 그러면 닿을 수 없는 별로 날아가버릴까봐 두렵다. 


“세운 씨요? 마음이 심해처럼 깊은 사람 같아요.” 차애가 어떤 사람 같아 보이냐는 DJ의 질문에 최애가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민석이가 사람 볼 줄 아네.” 마음속 차애덕후도, 최애덕후도 동시에 기뻐했다. 방송이 끝나고 차애가 사인에 한창이던 최애의 팔뚝을 콕 찔렀다. 카메라에 같이 마지막 인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귀엽게 두 손을 흔드는 차애 옆에서 최애가 수줍게 손을 한 번 흔들었다. 마음 속 두 덕후의 손이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고 했던가. 머글들과 마찬가지로 현생을 살고 있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덕후인 걸까. 늦은 밤, 잠들려는 나에게 남편이 뭘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덕질이 하고 싶다고 했단다. 내 무의식에 새겨져 있던 2년간의 뜨거운 움직임, 꿈틀거렸다. 또 다시 이전처럼 설렐 수 있을까. 


(2022.1.18)


D님과 첫인사를 하고, 덕질 이야기를 한참 했다. 덕질을 할 때는 햇빛이 늘 내 위를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최애와 차애에게는 늘 미안했다. 그들이 선물해준 빛나는 하루만큼 소중한 것을 나는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듣고, 보고, 티케팅하고, 조공하는 일밖에 해줄 수 없기에 거기에 사활을 걸었던 시절. 정오처럼 밝았던 때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밀한 상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