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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Feb 20. 2022

비밀한 상처

※성북구 책방 '부비프'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온라인 글방에 참여해 쓴 글입니다. 매주의 글감과 필자의 글, 짧은 모임 후기를 올립니다. 

이 주의 글감

그런 시기가 있다. 어떻게든 그 시절, 그 사건을 혹은 그 기억을 복기하고 반추하고 해석해내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정리해야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갈 수 있는.
<활활발발>, 어딘 

모임에 참여한 지 6개월이 되었는데, 가장 어려웠던 주제였다. 무엇을 써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오랫 동안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이어서 난감했다. 내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아예 다른 주제로 쓰거나, 소설이나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쓰거나,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독서모임에서 <문 뒤에서>라는 책을 만났다. 그리고 서툴더라도 마지막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쉰이 넘은 소설가가 있다. 사십대에 이르러 그 나라의 대표 작가로 불린 그는 역작들을 쏟아낸 지 10여년이 지난 무렵, 돌연 성장소설 한 편을 발표한다. 그가 쓴 다른 작품에 비해 썩 훌륭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단을 곱씹으며 독자는 알게 된다. 중년이 되도록 쓰지 못했지만, 그가 꼭 써야만 했던 이야기임을. 백발이 성성한 소설가는 자기 안의 생채기를 후벼 파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 아이였을 때, 소년이었을 때, 젊은이였을 때, 어른이 되어서도. 돌아보면 여러 번 이른바 절망의 바닥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에게 유독 암울하던 시기는 1929년 10월에서 1930년 6월 사이, 고등학교 일학년이던 몇 달로 기억한다. 그후 흐른 세월은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몰래 피흘리던, 온전히 비밀한 상처로 남은 아픔을 세월이 치유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 뒤에서>, 조르조 바사니 


열네살 아이가 겪은 비밀한 상처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한없이 가볍다. 오랜 시간 집에서 함께 숙제하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자신의 험담을 가감없이 늘어놓는 것을 문 뒤에서 엿듣게 된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을 기억해내는 그의 육성은 결코 가벼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의 일을 묘사하는 한 줄 한 줄이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고통의 무게는 오직 자신만이 가늠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잠깐 나쁜 꿈을 꿨다 생각하고 털어버리는 먼지같은 일이 어떤 이에겐 평생을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가 될 수 있다. 유독 이번 글방의 글은 쓸 수 없었다. 가장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내게는 비밀한 아픔을 생생하게 드러낼 만한 마음의 준비가 아무래도 되지 않는 탓이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날 밤이면 꿈을 꾼다. 꿈 속의 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다. 어김없이 그 아이가 나타난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사려고 애를 쓴다. 마침내 친구가 되고, 평소처럼 생각이 많아 책상에 엎드린 내 뒤에서 그 아이는 나를 꼭 안아준다. 


잠을 깬다. 그 아이가 안았던 내 등은 땀으로 젖어 있다. 온몸이 땀으로 절여진 듯 힘이 없다.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며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한 번은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 아이와 나 모두와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는 내 이야기를 하면,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까.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 아이를 봤을 때, 알게 되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걸. 그 아이는 버진로드 뒤편에 서 있었다. 늦게 와서 자리를 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나에게 그 아이의 눈이 머문 순간,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서로 보지 못할 걸 봐버린 사람들처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결혼식 내내 뒤통수가 뜨거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궁금함이 두려움을 이겨 뒤를 돌아본 순간, 그 아이는 그 곳에 없었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부페에서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절대 그 아이에게 연락하지 못할 것이다. 쉰을 넘어서는 물론 할머니가 되어서까지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버릇이 생겼다. 내 모습 그대로를 보이면 또 그 말을 들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상대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굳어 있거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오랜 시간 한 사람과 긴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처음에는 나에게 호의적이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떠나간다고 믿었다. 무례하고 선을 넘는 사람들에게조차 나는 관대했다. 아무에게도 거절과 거부를 할 수 없었다. 내 속에 남은 상처를 타인에게는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차 나를 보여주지 않고, 자주 침묵을 택하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사실은 닫혀 있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낯선 타인을 만나면 그를 불편하지 않게 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고, 그래서 오래된 소수의 인연들만, 아니면 내가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어떤 부분이든 조금씩 나와 닮아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그 아이와는 닮지 않았다. 


“이제 진짜 너무 싫어.” 

조회대 옆 동상에서 그 아이는 말했었다. 그 말을 말하며 콕콕 흙을 다지던 슬리퍼 신은 발이 생각난다. 내가 아끼던 친구였다. 그래서 자주 다퉜고, 그때마다 눈물의 재회를 하며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시간에 급식을 먹고 여느 때처럼 학교 밖을 빈둥대다가 그 아이가 한 마디를 꺼냈다. 

그 다음 날부터 그 아이에게 어떤 말도 걸 수 없었다. 그 아이 역시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무리에 속한 우리는 평소처럼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예전처럼 농담을 하며 밥을 먹었다. 


3학년이 되면서 아이는 대놓고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곳마다 붙어다니며 안 좋은 말을 퍼부었다. 쯧쯧 혀를 차기도 하고, 한껏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 아이에겐 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불만이었다. 

교실 밖을 나서는 게 겁났다. 학교 안팎을 제집처럼 쏘다니던 나는 화장실을 가는 이외에는 내 책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 아이처럼 깊이 마음을 주지 않았다. 


수능시험이 있던 날, 쉬는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그 아이를 마주쳤다. 그 아이가 나더러 들으라는 듯 옆에 있던 친구에게 했던 말. “아씨, 쟤 얼굴 마주쳤어. 이번 수능은 망했다.” 그 말에도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력했다. 


수능이 끝나고, 졸업을 하고, 서울로 대학에 갔다. 서둘러 어두웠던 10대의 마지막을 닫고, 예전의 나를 연기했다. 마주치는 얼굴이라면 모두 친구로 만들었고, 누가 봐도 튀는 옷차림에 개그를 장착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많은 친구는 내게 버거웠고, 나는 사실 남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주 글 안으로 숨어버렸고, 가까웠던 관계가 소원해질때마다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했다. 나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 가끔 대화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닫아버린다. 마치 그 시절을 건너 뛴 사람처럼 살고 있다. 


내가 싫다는 그 아이의 말이 이따금씩 떠오를 때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되돌려보며 질문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언젠가는 나만큼 그 아이도 나에게 상처받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그 후에는 내가 아닌 그 아이의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좋았던 시절만 기억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가 하나의 눈덩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맺으며 나라는 눈덩이를 굴려줬을 거라고. 그 아이도 나를 만들어준 사람 중 하나로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시간이 각기 다른 답을 건넨다. 속살은 열여덟로 남아 있는 채, 두툼한 이불처럼 그 위로 굳은살이 쌓인다. 언젠가는 나도 생생하게 그날의 일을 기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평생 질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아이가 던진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면서 내 인생은 완성되어갈 것이다.    


(2022.1.12)



처음으로 타인에게 꺼내 본 일이었다. 참 힘들었겠다, 는 말이 오랜 상처에 와 닿았다. "그깟 X 때문에 괴롭게 살지 말라"며 나 대신 시원하게 욕을 해준 H님에게도 고마웠다. 모임이 끝나고 난 후에는 크게 울고 난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서 내 속에 뚫려 있던 구멍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은 꺼내야 했고, 아파야 했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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