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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Feb 20. 2022

좋진 않지만 싫진 않은 날

※성북구 책방 '부비프'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온라인 글방에 참여해 쓴 글입니다. 매주의 글감과 필자의 글, 짧은 모임 후기를 올립니다. 

이 주의 글감 

무언가를 거절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곤란한, 
말하자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다. 
사람들은 혹여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싫어'라는 말을
완곡한 다른 말들로 대체한다. 
<성적동의>, 밀레나 포포바 

'싫어'라는 말에 꽂혔다. 좋아하는 것들은 넓고 추상적이다. 반면 싫어하는 것들은 어찌나 구체적인지. 나는 눈 감고도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줄줄줄 욀 수 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써보았다. 


나는 본론보다 뒷얘기를 더 좋아하는 에디터였다. 미팅을 하면 얼른 회의를 마치고, 만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어요?” 같은 질문. 그러다 보면 기사에는 쓸 수 없는, 하지만 더욱 진실에 가까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평생 도망만 치면서 살았어요.” 한 CEO의 말이었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너무 싫어 회사에 갔고, 회사에서는 상사가 너무 싫어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을 하면서는 주어진 책임감이 버거워 대표 자리를 넘기고 다른 회사로 갔고, 다른 회사에서 또 싫은 사람을 피하다 보니 지금 회사의 대표로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것엔 둔감하지만, 싫어하는 것엔 민감한 편이다. 내 몸 아픈 건 죽어도 싫어해서 조금만 아파도 엄살이 엄청나다.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돼서 회사를 박차고 나온 기억도 종종 있다. 무엇보다 싫어하는 일을 하면 몸이 반응한다. 금세 두드러기가 돋고, 가슴이 껑충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래서 특기는 그만두기, 취미는 그만두고 놀기가 돼버렸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간 삶과 싫어하는 것을 피해간 삶. 무엇이 옳게 잘산 걸까. 그보다 앞서, 그 둘의 실상은 너무나 닮아 있다. 그 모양이 어쨌든 하나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니까. 


좋아하는 걸 고르라는 말에는 자주 망설이게 된다. 좋아하는 걸 선택했다가도 이내 시들고 말거나, 더 좋았을 뻔한 선택들이 눈에 아른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를 넘어 좋아한다는 감정이란 뭘까, 까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싫은 걸 고르는 건 무지하게 쉽다. 눈길도 주기 싫고, 만지기도 싫고, 상상하긴 더 싫은 것들은 세상에 차고 넘치니까. 그런 일들을 다 제치고 눈앞에 남은 일들을 꾸역꾸역 해내면 된다. 그런 것들은 미치게 행복하거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푹 빠지진 않지만 정말로 해낼 만하다.


이것이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고 회사를 뛰쳐나온 백수 2년차의 결론이다. 읽고, 쓰고, 여행하는 사람이 될 줄로 믿었건만 현실은 달랐다. 하고 싶었던 것은 알고 보니 좋아하는 게 아니었고, 허공을 더듬거리며 나는 오래 외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불만 부여잡고 몇 개의 계절을 그저 흘려보냈다. 


너무 싫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숨 막히게 좋지 않아도, 그럭저럭 할 만한 것으로도 역시 괜찮지 않을까? 딱 그 정도의 미지근함으로 주어진 하루를 그저 그렇게 살아낼 수 있다면 꿈 없이도 잘 자는 사람처럼, 나름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요즘은 다시 이력서를 쓴다. 아무것도 기대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써보기로 마음 먹었다는 건 끔찍하게 싫다는 건 아니니까, 하면서 희망도 없이 무심하게 글자를 적는다. 별다른 포부가 없어도 종이는 잘만 채워진다. 


(2022.1.26)



여자로 살면서 '불편'했던 기억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정색하며 "왜 그러세요?" 할 정도로 심하진 않지만, 그냥 뭉개버리기는 싫었던 순간들. 상대는 늘 모호한 단어와 뉘앙스를 풍기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후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런 순간들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는 없을까. 애초에 현명한 대처란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불편함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만이 은근한 불편함에 대처하는 확실한 방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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