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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Feb 20. 2022

밥 맛

※성북구 책방 '부비프'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온라인 글방에 참여해 쓴 글입니다. 매주의 글감과 필자의 글, 짧은 모임 후기를 올립니다. 

마감일을 앞둔 새벽에서야 노트북 앞에 앉았다. 글감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이전에 썼던 글을 살펴봤다. 2년 전, 친한 친구 S와 브런치에서 함께 썼던 글이 있었다. '회사 밥 맛'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여기에 요즘의 이야기를 '집 밥 맛'으로 이어 썼다. 

 


회사 밥 맛 (2020.8) 


아그작 아그작. 고양이가 밥을 먹는다. 죽다 살아나 뼈만 앙상했던 내 고양이 엉덩이는 동그래졌다. 내가 번 고양이 밥이 고양이 엉덩이를, 배를, 팔다리를 만들었다. 희한하게 자려고 누우면 밥그릇 앞으로 간다. 회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콩닥거릴 때, 고양이 밥 먹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내일도 회사에 가야 한다는 걸 비교적 고요하게 받아들인다. 


고양이가 없었을 땐 밥을 벌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없었다. 나는 경제관념이 없다. 내 월급은 전혀 관리되지 않은 채로 통장에 박혔다. 월세, 관리비, 옷값 등으로 뜯겨나가고 또 뒤돌면 다음달 월급이 모인다. 나는 통장 잔고를 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퇴사에도 용감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지금은 망설인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다가도 '오늘 하루만 더...'라고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 내 고양이는 홀리스터급 사료만 먹는다. 밥값을 대려면 약간의 치욕쯤은 참아야 한다. 절대 더 낮은 급의 사료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밥 맛은 늘 밥맛이다. 어디서 뭘 먹어도 그렇다. 사실, 마음 편하게 무엇을 먹어본 일이 없다. 오늘 저녁, 회사 맞은편 명동 거리를 걷다가 몇 십년 된 맛집들이 포진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맛집정글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매일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우걱우걱 삼키곤 한다. 정글은 회사 하나로 충분하다. 


고양이는 매일 같은 밥을 먹지만, 성실하게 먹는다. 처음에는 씹지 않고 알갱이 째로 삼켜 애를 태우더니, 한 알 한 알 소홀히 하지 않고 야무지게 씹어 넘기는 고양이가 되었다. 밥 씹는 소리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충실하게 살아내는 일상의 리듬. 밥의 맛을 느낄 줄 아는 느낌이의 리듬. 나는 언제쯤 듣기 좋게 회사 밥을 씹어 먹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집 밥 맛(2022.2)   


집에만 있는데도 걱정이 많다. 그중 제일은 끼니 걱정이다. 요리를 못 하는 나는 거의 매 끼니를 동거인에게 의지했었다. 하지만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지금은 하루에 두 끼를 사이좋게 한 끼씩 차린다. 


자취할 때는 끼니 걱정이 없이 살았다. 마음 놓고 뒹굴다가 배가 고프면 몇 시든 상관없이 대충 밥을 먹었다. 그 마저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을 굶기 일쑤였다. 하지만 새로 들인 동거인은 정확히 열두 시와 여섯 시가 되면 꼭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허기가 지든 그렇지 않든 무조건 끼니를 채워야 한다. 


그래서 온갖 밀키트를 사모은다. 우리집 밥에서는 집밥이 아니라 회사 밥 맛이 난다. 규격화된 단맛과 매운맛, 그리고 감칠맛. 본가에서 공수해 온 밑반찬들이 그나마 집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나마 한 끼를 마치고 설거지를 할 때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해치운 듯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모든 게 게으름 탓이다. 지난 여름, 내게도 루틴이란 게 있었다. 여덟 시면 일어나, 아파트 동을 한 바퀴 돌고, 간단한 재료를 샀다.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가만히 흔들거리다가 밥을 했다. 백선생의 유튜브를 보고 배운 탓에 모든 요리에서는 비슷한 맛이 났지만, 요리를 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첫 끼니까지는 넉넉히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고, 도마 위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칼질을 하고, 숟가락을 연거푸 뜨며 양념장을 만드는 일은 재밌었다. 식사는 기나긴 놀이 후의 마침표 같았달까. 


몸이 무겁고 잠이 많아진 나는 첫 끼니부터 허둥댄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두세 시에 늦은 점심을 먹기 일쑤다. 국과 반찬은 식어 있고, 내가 일어날 때까지 굶주린 동거인의 얼굴은 어둡다.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리고 있으면 금세 저녁시간이 다가온다. 


자동급식기를 산 후, 고양이의 식사는 한층 더 규칙적이다. 매일 아침 여덟 시와 오후 네 시, 자정에 사료가 공급되고, 사료가 나오는 동안 노래가 나오면 고양이는 벌떡 일어나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다. 평생 게을러도 규칙적으로 먹는 고양이가 부럽다. 나는 집에서 집밥을 먹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2022.2.9)



1년 전, 회사를 그만 둘 때 이 글을 읽었더라면! 고양이 밥값을 생각하면서 퇴사를 참았을 텐데! 싶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내가 점심시간을 포기할 만큼 고된 회사생활을 했으니, 퇴사라는 결말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엔 회사 밥 맛을 누릴 수 있는 회사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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