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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Feb 20. 2022

중고나라

※성북구 책방 '부비프'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온라인 글방에 참여해 쓴 글입니다. 매주의 글감과 필자의 글, 짧은 모임 후기를 올립니다. 

4주가 지났다. 다시 새로운 분들과 글을 나누는 첫 모임, 첫 모임의 글감은 늘 '자유주제'다. 글감을 찾으려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를 때 메모장에 기록해두는 버릇이 있다. 2015년에 써둔 메모를 봤는데, 간밤에 꿈 꾼 내용을 적어 놓은 메모였다. 

메모의 전문을 1번으로 해서 총 네 조각의 짧은 소설을 써보았다. 



1.

중고나라에서 베개를 샀는데 이상한 게 왔다. 비닐을 뜯어보니 소매가 해진 대학교 야구잠바와 바지 열 벌이 정갈하게 접혀서 왔다. 옷들은 하나같이 색이 바래졌고, 낡을대로 낡았지만 옷에서는 주인의 옷장 냄새가 난다. 

다시 중고나라에 들어가 내 댓글을 확인한 후에야 모르고 다른 이의 게시글에 산다고 댓글을 달고 입금을 했단 걸 알았다. 베개 하나 값으로 누군가는 자주 입는 평상복임이 분명한 옷가지들을 팔아야 했을까. 그는 이제 무얼 입고 살 것인가. 


2.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이 의식주가 아니라고 믿어왔다. 그런 내가 오늘 사기로 한 건 꽃다발이다. 스물넷이 되도록 창문이 없는 하숙집의 방 한 칸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같이 입학한 하숙집 애들이 취업을 한 후, 불 꺼진 방이 늘어나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애에게는 캔커피 대신, 꾹꾹 눌러 쓴 쪽지 대신 꽃을 주고 싶었다. 화사한 핑크색의 꽃을. 

방을 팔 수도, 밥을 팔 수도 없으니 옷을 팔기로 했다. 듣자 하니 요즘 중고나라에서 누가 입던 옷을 사 입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글을 올린 지 반나절 만에 옷이 팔렸다. 이제는 나도 꽃을 살 수 있다. 


3.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나서려는데, 듬성듬성한 꽃다발이 불쑥 내 눈 앞에 다가온다. 핑크색 장미와 라넌큘러스 몇 송이가 포장지에 감싸여 있다. 눈간, 겹쳐진다. 함께 덮던 이불. 

4월에서 5월까지, 그 애를 만날 때마다 들렀던 호텔방. 모던한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던 핑크색 꽃무늬 이불을 덮고 한 달을 보냈다. 5월의 마지막 날, 사소한 다툼을 끝으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한다는 것이 영영 이별로 이어지고 말았다. 라넌큘러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4월 한가운데 와 있다는 걸. 


4.

그 애의 고백을 받고 나서 오래 전의 나를 졸랐다. 한 번만 약속을 어기게 해달라고. 내 집을 갖는 날까지 나는 마치 모든 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기로 나와 약속했다. 좋아 보이는 것은 하나도 갖지 않기로. 내가 갖지 않기로 한 것에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5월이 끝날 때까지만 나와의 약속을 깨기로 하고 사랑을 시작했다. 4월은 빨리 지나갔고, 금세 5월도 끝났고, 사랑도 끝이 났다. 사소한 다툼을 핑계로 헤어진 다음날, 혼자 호텔방에 갔다. 꽃무늬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가방 안에 꽃무늬 베개를 넣어 나왔다. 1년 동안 내 방에서 꽃무늬 베개를 베고 잘 잤다. 그리고 전세 기간이 끝나, 이삿짐을 쌌다. 

짐을 다 싸고 난 후에도 베개는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고나라에 판다고 글을 올렸지만, 아무도 사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 옷가지를 담아둔 박스 안에 베개를 함께 넣었다. 박스 안에 핑크꽃이 만발했다. 꽃다발을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2022.2.16) 




늘 그랬듯 마감시간에 쫓기며 떠오르는 대로 적어내려갔는데, 이상하게 모든 인물이 조금씩 나를 닮았다. 서사보다는 잘 개어진 옷, 듬성듬성한 꽃다발, 가방 안에 베개가 들어 있는 모습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축으로 엮어본 글이라, 소설임에도 이야기성은 약하다. 그래서인지 단편영화 같다는 평을 들었는데, 힘을 주고 싶었던 이미지를 읽는 이도 선명하게 경험해주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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