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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06. 2022

시장

동네시장의 이름은 번개시장이었다. 해가 뜰 무렵이면 상인과 손님들로 붐볐다가 해가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떠나는 모습이 별안간 쳤다가 사라지는 번개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왔다. 장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가진 돈이라곤 며칠 전 동네슈퍼 주인에게 빌린 이천원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다 써서는 안 됐다. 내일 장 볼 돈 역시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장 입구에는 목마들이 있었다. 목마는 한 마리에 이백원. 엄마들은 아이를 목마에 앉혀두고 장을 보러 갔다. 여인 역시 익숙한 듯 목마 주인에게 이백원을 건넨다. 아이는 다들 낡았지만 색깔과 생김새가 조금씩 다른 목마들 중 오늘 탈 목마를 고른다. 아이를 안아 태운 후, 시장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엄마가 장을 보러 간 불과 몇 십분 사이가 아이에겐 영겁의 시간 같다. 삐그덕 삐그덕 관절 소리를 내는 목마를 타며 허공을 응시한다. 목마와 함께 흔들리며 엄마를 기다린다는 사실도 흐릿해질 때 즈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목마 주인이 아이를 내려주자마자, 신이 나서 엄마에게 안긴다. 


울지 않고 엄마를 기다린 보상은 오뎅이다. 근처 포장마차에서 길쭉한 오뎅 하나를 사면, 주인이 짧은 나무젓가락에 오뎅을 옮겨 꽂는다. 아이 손에 오뎅을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라 힘이 들지만, 입에 오뎅을 문 아이는 칭얼대지 않는다. 


아이와 둘만 남은 한낮의 집 안, 시간이 빠듯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 서주우유맛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고 아이를 달래다 포기하고는, 우는 아이를 집에 놓고 문을 잠근다. 시장까지 사력을 다해 달린다. 계란과 대파, 양파, 그리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돌아오면 울다 지친 아이는 멍하게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 아이스크림을 뜯어주면 그제야 울던 것이 기억난다는 듯, 훌쩍거리며 핥는다. 


아이는 자라 여인이 되었다. 아이는 별안간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 버려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그 느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진실인지도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20대의 끝 무렵, 심리상담사와의 대화 중 시장과 집에서 혼자 남겨진 날을 어렴풋이 찾아내고는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어가는 엄마에 대한 미움을 키운다. 나는 자주 혼자 남겨졌었구나, 생각할 때 익숙한 서늘함이 여인을 스친다. 


그때 오른 팔뚝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진다. 물의 감각이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아직 아이였던 여인은 몇 번이고 엄마를 부르며 운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급하게 달려와 아이 옆에 모로 눕는다. 아이의 오른팔을 왼손으로 두드리는데, 엄마의 오른손이 젖어 있다. 부엌 일을 하며 묻은 손의 물기를 채 닦지 못하고 온 탓이다. 차가운 물. 급한 손놀림. 바쁜 엄마. 슬픈 엄마. 엄마도 슬플 때가 있었겠지? 


아이가 클수록 번개시장은 작아졌다. 한낮에도 손님이 거의 없더니, 시장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떡볶이 트럭만 외롭게 지키고 있던 빈 땅에는 마트가 들어섰다. 시장에서 급하게 장을 보고, 함께 목마를 타던 이들은 외지로 흩어졌다. 이제 마트 자리에 시장이 있었다는 걸 아는 동네 사람은 많지 않다.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장이 서고, 닫힌다. 목마가 달리고, 멈춘다. 여인은 걸음을 재촉하고, 아이는 계속 울지 말지 망설인다. 손에 쥔 천원짜리 두 장이 오백원짜리로, 백원짜리로 바뀐다. 한때 여인이었고, 지금도 엄마인 나의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세탁소에 간다. 마트 바로 옆자리에 들어선 세탁소다. 세탁소를 오갈 때마다 그녀의 기억속에도 장이 서는지. 기다릴 아이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채로 값을 흥정하는지. 가끔씩 오후만 되면 아무 할 일이 없어도 마음이 뜀박질을 치지는 않는지. 언젠가 그 이유를 되짚어보다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시장을 맞닥뜨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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