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일락 May 23. 2022

졸음노동자

아침 여덟 시, 잠을 깬다. 나갈 채비를 마친 남편이 침대 앞에 서 있다. 겨우 눈을 떠 인사를 하고 잠에 빠진다. 


열한 시, 알람이 울린다. 끈다. 


열두 시, 다시 알람이 울린다. 지금 일어나봤자 모두가 점심 먹을 시간이다.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만 더 자자. 

빅스비, 10분 후에 알람해줘. 빅스비, 7분 후에 알람해줘. 빅스비, 5분만. 스피커에게 애걸복걸한다. 

오후 두시, 침대에서 일어나 점심을 먹는다. 맛없는 다이어트 식단이다. 전자레인지에 얼른 데워 먹고 커피를 내린다. 


다행히 이때까지도 슬랙에선 아무 일이 없다. 할 일이 많은데, 아무도 아직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묘한 안도감이 몰려온다. 언젠가는 마감이 닥쳐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뜻인데… 그래도 당장 일하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 된다. 


쓴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차려진다. 아주 가끔은 기분 좋은 각성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세상을 얻은 사람처럼 슬랙을 활보하고, 키보드 위를 질주한다. 잠깐의 축복. 

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대개는 슬랙창을 켠 채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견딘다. 


기획안을 확인했다고 하면, 연사 섭외가 완료됐냐고 물으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다고 하면 바로바로 답장해야지, 하면서 시간을 죽인다. 


우리집 뻐꾸기 시계는 기가 막히다. 네 시에는 네 번, 다섯 시에는 다섯 번 운다. 30분마다 딴짓을 할까봐 매시 30분에도 한 번씩 울어재낀다. 그래도 나는 일할 생각이 전혀 없다. 


노트북을 식탁 맞은편으로 밀어두고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을 뒤적인다. 책을 펴자마자 졸음이 온다. 오늘 열 시간도 넘게 잤는 걸? 왜 또 졸음이 오는 걸까? 


책을 덮고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몸은, 내 정신상태는, 도대체 나는 뭐가 문제인가. 


어제 오후, 졸음 속에서 이불을 덮고 생각했었다. 나의 가장 친한 착실한 친구를. 매일 일곱 시면 일어나 회사에 가고, 다섯 시 반이면 퇴근을 하고,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하고, 겨울의 휴가계획을 여름도 되기 전에 미리 짜는 내 친구를. 늘 왈츠를 추는 듯 우아한 그 애의 리듬을.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친구도 나도 똑같이 어른인데, 다들 힘들어도 잘 참고 사는데 왜 나만 안 된단 말인가. 나만 이렇게 못 참아서야 될 일인가. 참자. 참고 일어나자! 

하면서도 이불 안으로 더 깊숙이 숨어들고야 마는 것이다. 


회사에 다니는 7년의 매일이 내게는 생지옥불에서 구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실시간으로 오징어처럼 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매분매초를 잘 참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늘 정신 차리면 지옥불에서 탈출한 후였다. 잠시 자유를 즐기다 또다시 나를 불 속으로 밀어넣었고, 온몸이 타버리기 직전 빠져 나와 몸 구석구석에 찬물을 들이붓느라 분주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어떻게 참는 걸까. 아무 생각 하지 않으면 좀 더 잘 참아지는 걸까. 어떻게 하면 아무 생각을 않을 수 있지? 


“대충 살아”, “너무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을 유행곡 가사처럼 듣고 살아왔다. 이미 모든 일에 너무 신경 쓰던 사람이 갑자기 그 모든 일들에 신경을 끄기란 쉽지 않다. 30년을 두 발로 걸어온 내게 우리 고양이가 “이제 나처럼 네 발로 걸으렴”이라고 말했을 때의 당혹감과 비슷하달까. 


아, 고양이 말고 차라리 달팽이가 되고 싶다. 사랑스러운 털 하나 없어도 단순한 두뇌를 가지고 단단한 껍질 안에 쳐박혀 하루 종일 자고 싶다. 아무 것도 생각 않고 싶다. 


멀미가 나도 정신없이 달려야 했던 회사에서 뛰어 내린 후, 의사는 내게 번아웃을 진단했다. 그때 나는 신혼여행을 가서도 마감을 했지만, 지금은 열 시간 넘게 자고, 새벽 네다섯 시까지 넷플릭스를 보고, 일은 슬랙이 나를 엄습할 때만 한다. 그런데도 증상은 똑같다. 의욕이라곤 실오라기만큼도 생기지 않고, 커피를 들이부어도 눈이 떠지지 않으며 머릿속에 왔다갔다하는 생각은 많고 많지만 대체로 멍하다. 나처럼 열심히 안 사는 사람도 번아웃에 걸릴 수 있는 걸까.


나의 졸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일을 너무 하기 싫어서, 밤이 되면 가게의 셔터가 닫히듯 눈꺼풀이 닫혀버리는 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졸음이 걷힐까. 나도 명징한 정신으로 건강한 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 성취감과 보람을 손에 쥐고 조금은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일을 사랑한다는 건 뭘까. 적어도 싫어하진 않는다는 걸까. 조금만 싫어한다는 걸까. 하루종일 엉금엉금 생각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며 이불 속으로, 잠 속으로 기어들어가기만 바라는 내가 꿈 아닌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기나 할까. 두뇌를, 몸을,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이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여섯 시,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다. 다행히도 슬랙은 오지 않았다. 메모장에 써둔 오늘의 할일을 가뿐하게 내일로 미룬 채 모니터를 끄려다 인터넷 쇼핑몰을, 블로그 속 산 전망이 끝내주는 어느 집의 베란다를 바라본다. 일이 끝나도 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일에서 돌아온 남편과 저녁을 먹고, TV를 본다. 호들갑을 떨며 웃고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 와중에도 졸리다. 졸리지만 잠은 안 온다. 


남편이 자러 들어가고 어느 덧 새벽 세 시. 베란다 창으로 불켜진 앞 동을 바라본다. 매일 두 집만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다. 그 중 한 집 부엌창으로는 설거지하는 손이 보인다. 바쁜 일과를 마무리하는 손길. 하얀 손이 바쁘다. 


바쁘지 않은 나는 피곤하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다. 졸려서 멍하게 TV를 보다가 동이 틀 무렵 침대로 들어가 남편에게 말을 건다. 남편은 자면서도 대답을 잘한다. 일도 잘하고, 잠도 잘 자고, 꼬박꼬박 대답도 잘하는 남편이 부러워 아프도록 볼을 꼬집는다. 


침대 밑에 누운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을 어떡할지 결정하고, 30년 후에도 이렇게 살면 어쩌나 고민하다가 스위치가 꺼진다. 툭. 꿈 속으로 날 밀어넣는다.  


꿈 속에서만큼은 졸음이 오지 않아 걸어다니고, 누군가를 만나고, 울기도 하고, 무언가 꿈꿔도 본다. 꿈속에서만큼은 살아있다. 


이 꿈에서 내일은 깨지 않았으면. 깨지 않고 꿈 속에서만 영영 살 수 있었으면. 졸리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일할 수 있었으면. 꿈인 걸 알면서도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