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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Aug 08. 2022

책과의 동거


‘나는 누구일까’ 궁금할 때는 엄마에게 물어보면 뜻밖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너 어렸을 때 얌전했지. 포대기에 업고 책 한 권 쥐어주면 몇 시간씩 안 울고 잘 있었어. 책이 없으면 급한 대로 문구점에서 공책이라도 하나 사서 줬는데, 그러면 아무 소리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했어. 너 업고 집안일도 하고, 고모 식당 일도 돕고 그랬지.”


엄마에게는 이런 기억도 있다. 

“엄마 찾는 아기 거북 이야기가 나오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만 읽어주면 애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거야. 우는 게 귀여워서 자꾸 읽어줬지.” 

30년 전 엄마가 읽어줬다던 책은 『헤엄치는 게 참 좋아』라는 제목으로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다. 우리 학교는 교실에 급식차가 와서 배식을 받았는데 점심시간이면 옆자리 애들과 이야기하는 대신, 밥과 반찬이 담긴 식판을 앞에 두고 책을 펼쳤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식판을 급식차에 둔 후, 자리로 돌아가 마저 책을 읽었다. 사실, 책이 잘 읽히지는 않았다. 그저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으로 ‘나는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친구를 싫어하는 거야’라고 되뇌었던 순간만이 생생하다. 


3학년 때 『우주 자전거』라는 시집을 읽었다. 몇 글자 쓰고 한 줄 띄고, 몇 줄 쓰고 한 줄을 비워두는 쿨함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해 여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두색 연습장에 손글씨로 시를 써서 방학숙제로 냈다. 엄마는 조롱박을 말린 후, 마카로 ‘별’이라는 제목의 내 시를 적어 거실에 걸어두었다. 


고학년 때는 학교에서 반가운 통신문이 날아왔다. 단체 구매가로 책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하는 책을 표시한 신청서와 책값이 담긴 흰 봉투를 학교에 냈고, 집으로 책 배달이 왔다.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전쟁과 평화』를 받자마자 침대에서 읽어 치웠다. 낮에 누웠다가 새벽에 일어났던 그날 하루, 뻐근하던 목의 통증이 생각난다.


주위 친구들과 그럭저럭 어울리며 보냈던 중학교 시절이 지나고, 고등학교 때는 이유 모를 슬픔에 시달렸다. 수업시간에 창밖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고 싶어졌고, 쉬는시간에 mp3를 귀에 꽂고 엎드려 있으면 눈물이 책상 위로 비처럼 떨어졌다. 같은 반 반장이던 다솜이는 아무것도 없는 연습장에 아무거나 써보라고 알려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다솜이 말대로 연습장을 사서 마음대로 그렸다. 여러 가지 모양의 줄을 긋기도 하고, 빙글빙글 달팽이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의 책꽂이에서 이모의 책을 발견했다. 『외딴방』이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맘에 들었다. 방학에도 학교에 가야 했던 8월, 30명이 넘는 아이들로 가득찬 교실에서 『외딴방』을 읽었다. 그 책을 읽을 때면 신기하게도 주위가 고요해졌다. 비누방울 안에 갇힌 사람처럼, 홀로 적막 가운데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조용해지고 싶을 때마다 책을 집어 들었다. 풀지 않은 문제집으로 가득찬 책꽂이엔 늘 『외딴방』이 구급약처럼 꽂혀 있었다.


1년 후, 동네 서점에서 보충수업 교재를 사다가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빨간 꽃이 크게 그려진 표지가 세련됐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2년 동안 이 책을 곁에 두었다. 기출문제를 풀고 인강을 듣는 애들과 달라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을 때마다 책을 꺼냈다. 책을 쓴 이가 쓴 시 구절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떠올렸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에 커다랗게 X자 표시를 하며 오늘의 날짜를 지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해치우고 어른이 되었다.


성장기라는 말로 포장되는 지루한 20년을 책과 함께 견뎠다. 지금도 마음이 힘들면 인터넷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읽고 싶은 책을 마구 리스트에 넣어둔다. 그리고 마음이 풀리면 책을 잊는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사실은 아닌 것 같다. 책을 벗 삼아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어낼 뿐이다. 책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길 자주 바란다. 읽고 난 책은 집에 두지 말고 중고서점에 꼬박꼬박 내다 팔자고 다짐한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쌓인 책들을 보며 한숨 쉰다. 책의 무게를 버텨내는 책상 다리가 안쓰럽다. 더워진 방문을 꼭 닫고 에어콘이 나오는 거실로 나간다. 그렇게 책과의 동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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