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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31. 2022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사회에 나와서 줄곧 누군가를 밝혀주는 일을 했다. 출판편집자로 있을 때는 띠지에 들어갈 ‘별딱지’를 만드는 게 만만찮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니까, 저자의 약력과 SNS 게시글, 유튜브 영상을 모두 뒤져서 사람들이 압도당할 ‘숫자’를 찾았다. 생각하는대로 카피가 잘 나와서 내가 봐도 ‘이거, 꽤 있어 보이는데?’ 싶으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책표지는 별색을 써서 형광으로, 별딱지는 금색으로 번쩍이게 만들었다. 


디지털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면서는 비즈니스 관련 글과 강연을 기획했다. 내가 만든 콘텐츠에는 줄곧 ‘비결’, ‘성공 법칙’, ‘이유’로 끝나는 제목이 붙었다. 말하는 이의 성과가 직관적으로 보이도록 쓴 카피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그의 말 중 인사이트 있는 말에 밑줄을 긋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타깃은 물론, 타인의 성공 법칙을 적용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 일에 의미와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일이 끝나면 오래 피곤했다. 피곤은 묵직한 겨울이불처럼 퇴근길 버스 안에서 어깨를 짓눌렀는데, 30분을 짓눌린 채로 버스 의자에 앉아 있으면 내 몸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공허해지곤 했다. 그 느낌을 하루 종일 일에 충실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서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팽개쳐두고 소파에 늘어지면, 그야말로 숟가락 들 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프리랜서가 되어서도 여전히 같은 일을 한다. 책을 편집하고, 인터뷰를 하다가 지금은 강연을 기획한다. 매달 비즈니스 업계에서 ‘핫’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선도해나가는 기업과 인물을 섭외한다. 강연 전에 미팅을 해서 그가 일하는 과정,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준 원칙을 듣고 글로 정리한다. 정리한 글을 모아 판매페이지를 만들고, 신청자를 모집한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마감을 해야 했던 회사원 시절에 비하면, 일정이 넉넉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일하고 결과물을 내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번아웃과는 거리가 먼 삶 같다. 그런데도 피곤하다. 일을 하기 전엔 조금이라도 늦게 시작하고 싶어 빈둥대고, 일하고 나서는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속으로 오래 앓는다.


최근에 미팅했던 연사는 비즈니스의 ‘속성’을 이야기했다. BTS의 성공이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 주체가 누구든 비즈니스를 관통하는 ‘속성’이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나 역시 ‘속성’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온 일의 어떤 속성이 반복적으로 나를 그로기 상태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고백하자면, 나는 본론보다 뒷얘기에 관심이 많은 에디터다. 준비해 온 질문을 끝내고는 콘텐츠와는 관계없는 쓸데없는 질문을 던질 때가 많다. 어릴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제일 강렬했던 기억은 뭐였나요? 같은. 대놓고 고민상담을 청할 때도 있다. 일할 때 디테일에 집착해서 속도가 안 나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같은.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개 바쁘다. 한 시간은 고사하고, 10분의 휴식조차 사치인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다음 일정 사이에 여유가 있거나, 예전부터 너무 만나고 싶었거나,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라 생각될 경우에만 이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외없이 얼굴 근육의 힘을 풀고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콘텐츠로는 기록되지 않겠지만, 어쩌면 죽어 눈 감는 순간까지 생각날지도 모를 날것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은 인간적이다. 다정하다. 눈을 맞추고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들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순간을 만날 때면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가 어쩌면 사람을 무지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눈앞의 성과 말고 결국은 모두가 헤매고, 의심하고, 가끔은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에 쓰인 법칙대로 따라하면 이들과 비슷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 ‘사실은 그들도 당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성공 법칙 같은 거, 잘 몰라도 큰 일 안 생긴다고. 일하는 거, 조금 느려도 큰 사고 안 난다고.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 감춰진 어둠이 아니라, 평등하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사람들과 수다 떨고 싶다. 해가 지면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같이 지평선을 바라보고도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감도 좋은 마이크가 필요 없다. 오히려 귓속말이 어울린다. ‘여러분’이 아니라 ‘너’가 어울린다. ‘이건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인데’보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너한테만 말해줄게’라는 첫마디가 어울린다. 사실, 사람도 말하기도 좋아하는 내게는 이런 일이 썩 잘 어울린다. 


그런데, 무슨 일? 이 글을 보는 모니터 너머의 ‘너’가 묻는다면 나는 굳어버린다. ‘작은 목소리로 말 거는 일’은 실체도 없고, 근거도 빈약하며, 내게 현실로 다가오기보다는 SF소설 속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생각났다면, 이젠 그리운 이를 생각하듯 자주자주 떠올리며 윤곽을 그리는 일만 남았다. 우리의 현실도 오래 전엔 지극히 대책없는 SF의 한 장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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