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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Sep 05. 2022

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

"나랑 결혼할 때, 다짐한 거 있어?"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고." 

선잠이 든 남편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나 사실, 하고 싶은 게 없어.' 

이 말은 차마 못 하고 속으로 삼켰다. 






올빼미형인 나와 달리, 남편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짓궂은 습관이자, 내 일상 최고의 재미는 잠든 남편에게 뜬금없는 질문 던지기. 잠귀가 밝은 남편은 곤히 자면서도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준다.

"전생엔 뭐였을 것 같아?" 
"개구리."


대부분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답변인데, 가끔은 감탄이 나올 만큼 명쾌한 답변도 있다.   

"내가 예뻐 보일 때는?" 
"화장했을 때." 
"안 예뻐 보일 때는?" 
"화장 안 했을 때." 


대표적으로 이런 답변이 있다. 열받아서 다음 날 다그치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한다. 

그날도 배꼽 빠지게 웃을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불꺼진 거실에 앉아서 오랫 동안 헤아려봤다. 내가 하고 싶다는 건 다 해주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그는 글주변이 없다. 뼛속까지 공대생인데다 다년간의 논문 집필에 단련된 그의 문체는 너무나 건조한 나머지, 서걱거린다. 결혼식에서 낭독할 혼인선언서는 내가 총대를 메고 썼다. 쓰면서 괄호 안은 비워두고, 써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세심한 사람입니다.
그의 꼼꼼함, 학자로서의 날카로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아내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                              ) 남편이 되겠습니다.


숙제를 받아든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 나도 고양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건넨 혼인서약서엔 내가 두고두고 우려 먹는 그의 흑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아내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 매일 새로움을 주는 ) 남편이 되겠습니다. 

백화점 광고문구 아니냐며 놀렸던 이 한 줄은 너무도 정확한 그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새 거라면 뭐든지 좋아하고 보는 나를 위해 그는 매일 새로운 걸 사주진 못하지만, 새로움을 주는 남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이 무색하게도 오랫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대학생활을 누구보다 즐겼지만, 대학원에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온갖 잡다한 공부였지, 국문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는 상태로 회사를 다니면서도, 결국 회사를 때려치고도 하고 싶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가 좋아하는 책 제목이라는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 기다려봐도 그런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나, 글 써볼까봐." 

"무슨 글?" 

"제목은 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 이거야." 

읭?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학교와 실명은 노출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써보라고 격려해주었다. 



"근데 왜 그걸 쓰려고?"  

"에세이를 쓸려니까 남들한테는 없는 내 경험이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 남편은 교수인데 반백수인 사람 에세이는 아직 못 읽어본 것 같아서."

그에게 들은 동료 아내의 직업 중에는 교수도, 교사도, 회사원도, 주부도 있었지만 반백수는 없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반백수입니다"라고 말하진 못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한 그들을 위해 내가 말해보기로 했다. 



일단 시작은 했는데, 이제부터 뭘 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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