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 집은 나의 오랜 자랑이었다. 친구들의 집은 네모반듯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집의 모양은 정확히 그리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신비로움, 그 느낌이 좋았다.
40년 전, 아빠는 신시가지라 불리는 주택단지에서 집을 발견했다. 아빠 말에 따르면 어떤 예술가가 살고 있었다는 그 집은 땅의 절반이 초록 잔디로 둘러싸여 있었다. 잔디에 반한 아빠는 덜컥 그 집을 샀고, 사자마자 잔디밭은 형편 없는 크기로 줄어들었다. 원래의 짙은 빨강과 비교되는 새빨간 색의 상가건물, 회색 시멘트를 바른 주차장이 새로 들어섰다. 계단으로 이어진 2층짜리 주택을 둘로 막아, 2층은 세를 주고 1층에 가족이 들어와 살았다.
아빠와 연애하며 집을 구경한 엄마는 꿈을 꿨다고 했다. 번듯한 양옥에서 밥 굶지 않고 사는 꿈. 집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기로 했다. 엄마가 밟고 있던 작은 잔디밭을 제외하곤 모두가 빚이었다는 걸 까맣게 모른 채로. 매끼를 걱정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차근차근 빚을 갚았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새로 지어진 친구들의 아파트에 놀러 갈 때마다 심통을 부렸다. 우리도 거실이 넓은 집으로 이사가자고. 우리 동네에는 왜 놀이터도 없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아빠와 엄마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친구들의 집보다 우리집이 더 좋은 이유를 찾아주었다.
“걔네 집엔 잔디밭 있어? 라일락 나무는?”
10년이 지나 동네가 원룸촌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집을 팔라는 업자들의 성화에도 우리는 결국 집을 지켰다. 집을 파는 문제로 몇 번이나 가족회의를 했지만,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가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집이 나이를 먹고, 2층에 세들어 살던 마지막 가족이 이사가면서 집이 텅텅 빈 후에도 여전히 나는 빨간 벽돌 집보다 더 좋은 집을 알지 못한다. 거미줄 가득한 집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상상한다. 이 집은 기분이 어떨까?
그러다가 진짜로 집이 되었다. 집이 된 후에도 꽤 오랫 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병원에서 초음파로 내 배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측량하는 걸 보고서야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내가 집이었구나!
나는 걸어다니는 집이었다. 직접 집을 짓고 그 안에 살기 시작한 손님은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손님이 커질 때마다 집도 따라 늘어났다. 증축공사는 대개 늦은 밤에서 새벽에 이루어졌는데, 침대에 누우면 이해할 수 없는 몸의 어느 부위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당기곤 했다. 이러다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잠들면 신기하게 다음 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일어나 거울을 보면 집이 손가락 몇 마디 만큼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집이 커지면서 포기해야 하는 일도 늘었다. 좋아하는 고로케 집에서 30분 넘게 줄을 선 날, 배가 사정없이 위아래로 당겨왔다. 버스정류장에 쓰러지듯 걸터 앉았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야 속옷이 다 젖도록 나온 투명한 액체를 발견했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집도 입주민도 무사했지만, 며칠을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다.
입주민의 안전을 위해 집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하중을 견디는 배 아랫 부분을 손으로 받친 채 느릿느릿 걷는다. 걷기 시작한 시간을 기억해두었다가 30분이 지나면 어디든 털썩 주저앉아 쉰다. 오래 서 있거나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등을 대고 눕는 것도 피한다.
입주민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깊게 호흡한 후, 배 이곳저곳에 손을 대고 입주민의 이름을 불러본다. 툭툭. 노크가 느껴지면 그제야 안심한다. 잠에 들 때도 입주민이 옆구리를 차며 항의하면 곧장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그래야만 입주민도, 집도 잘 수 있다.
집이 된 몸을 돌볼 때면 눈 내린 아침, 마당을 쓸던 아빠가 생각난다. 멋져 보이던 집은 사실 작은 곳 하나하나 사람 손이 닿아야 하는 거대한 몸이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비 새는 곳이 있으면 막고, 강추위가 예고된 날에는 헌 이불을 끌어 모아 수도관을 감쌌다. 그렇게 여러 해에 걸쳐 사람이 집을 지켜냈다.
집이 된 나도 묵묵히 집을 지킨다. 이전엔 당연했던 외출과 쇼핑, 약속자리를 집을 위해 포기한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편한 신발을 신고, 색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펑퍼짐한 원피스를 꺼내 입는다. 많은 양의 혈액을 만드는 몸은 종일 끓는 커피포트처럼 뜨겁다. 마음 같아선 얼음이라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고 싶지만, 입주민의 몸이 추워질까 시원한 몇 잔의 물로 만족한다. 매달 병원에서 정기점검을 받지만,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병원으로 달려가 집의 이곳저곳을 잰다. 물 새는 곳은 없는지, 집 크기는 적당한지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며 한숨 푹 쉰다.
아이는 집을 어떻게 생각할까. 더 넓고 안락한 친구들의 집을 부러워하고 있진 않을까? 좀 좁고 덜컹거려도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오랜 빨간 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