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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Jul 11. 2023

실연의 추억

오랜만에 홍대에서 저녁 약속이 있던 날, 신나게 술을 마시고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움푹 패인 길에 구두굽이 걸려 제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누가 볼세라 급하게 몸을 일으켰는데, 왼쪽 무릎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이제 내가 넘어져도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구나, 나는 정말 혼자가 됐구나, 생각하는 순간 눈물은 커다란 울음으로 변했다. 다 큰 여자가 홍대 한복판에서 다리를 질질 끌며 소리내 울고 있었다. 이별한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1년 남짓 만나던 그와는 겨울이 봄으로 바뀔 무렵 헤어졌다. 학교 앞 오래된 찻집에서였는데, 언젠가 꼭 같이 와보자고 이야기하던 곳이었다. 싸움이 길어져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른다는 게 그곳에 왔다. 밀크티를 마시며 나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 했고, 언제나 그랬듯 그는 나의 꾸지람을 그저 받고만 있었다. 한바탕 화가 몰아치고, 이제는 그가 미안하다고 할 차례였는데 웬일인지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사과 대신 꺼낸 말. 

“미안. 그러니까 우리 그만하자.” 

계산하고 찻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그가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자고 했다.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는 곧장 앞만 보고 걸었다. 이제는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마음 졸일 필요도, 무심한 몇 마디에 잠을 설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후련해졌다. 


후련함 속에 감췄던 고통은 무릎의 상처와 함께 별안간 드러났다. 그날 이후로는 무슨 수를 써도 감춰지지 않았다. 우선, 내키는대로 술을 마셨다. 텅 빈 방에 들어가긴 싫어, 술을 마신 밤이면 하숙방 대신 학교에 갔다. 동아리방 소파에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이 들었다. 아침수업 전에 동아리방을 들르면 코를 찌르던 냄새. 친구는 그 여름을 내 술냄새로 기억한다. 술냄새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널브러져 있던 나도. 


혹시나 그를 만날까 신촌 거리를 몇 바퀴씩 돌며 여름을 보냈다. 자주 가던 카페 창가에서 그와 혼자된 나를 번갈아 떠올리며 글을 쓰고, 그의 이름과 비슷한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소설 제목은 빈 방. 자기 마음의 빈 칸을 모두 채운 남자는 떠나고, 둘이 살던 방에 여자 혼자 남는다. 소설이 실린 동아리 문집을 그의 하숙방 우편함에 넣어두고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왜 갑자기 나를 떠났을까. 매일 학교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나는 네가 매일 먹는 밥 같아.” 

헤어지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밥만 먹으면 질리지 않겠냐고 묻자, 밥 없이 어떻게 배를 채우겠냐고 되물었다. 그러다 밥이 없는 곳으로 영영 갔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지 않나. 빵도 먹고, 술도 먹고, 고기도 마음껏 먹다가 결국은 밥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머리 위에 느낌표가 뜨자마자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너는 잠깐 떠났지만 이것저것 다 해보고 즐기다가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아무런 답신도 오지 않았다.

 

마음은 부풀어 어느 날 밤, 전화로 그를 불러냈다. 아무래도 너 없인 안 되겠다고 하자, 의외로 순순히 약속장소에 나왔다. 최선을 다해서 도망쳤는데 사실은 너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등을 돌려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그의 집 앞으로 같이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를 불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신촌을 걸을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그 집 앞. 그는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돌아온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집에 돌아 오는 길은 어두워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에게선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악수는 그가 건넨 마지막 인사였다. 헤어지던 날부터 그렇게도 하고 싶어 했던 아름답고 젠틀한 인사. 한사코 거절했던 그 인사를 결국 나는 해주고야 말았다. 가슴이 떨어져나간 심정으로 며칠을 보내자, 가을이 찾아왔다. 9월 첫 주 동아리 신입생환영회날,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만큼이나 그 남자가 금세 좋아졌다. 


한번 만나자는 그의 연락에 너만큼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답장했다. 그를 보게 된 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 밤이었다. 그의 집 근처 카페에서 과거와 지금의 연인을 이야기했다. 나와 헤어진 후 그가 했던 몇 번의 연애와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다른 사람. 그 사람이 얼마나 잘해주는지, 우리가 얼마나 잘 만나고 있는지.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사는 집 근처로 같이 걸었다. 하숙방 맞은편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나는 이제 갈게. 나 몇 달 있다가 군대 가.
군대 갔다 오면 우리 그때 꼭 다시 만나자.” 

빠르게 몇 마디를 남기고 신호를 건넜다. 따라 건너지 않고 겨울코트를 입은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모습을 다시 보게 될까, 생각하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전화번호를 바꿨고, 그는 전화 대신 꾸준히 메신저로 연락해 왔다. 그가 군대에서 돌아왔을 무렵에도 내 옆에는 같은 남자가 있었고, 뜸해지는 그의 연락에 무응답으로 답하며 20대가 끝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결혼소식을 알게 되었다. 


비켜줘서 고맙다. 지금은 이것이 옛사랑에게 전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내 옆에 그가 없었기에 곧 나타난 인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제때 놓아줘서, 좀 더 노력했다면 연락이 닿을 수도 있었겠지만 덜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내 연애 인생 마지막 실연의 추억을 선물해준 것도 고맙다고. 뜨겁게 사랑했기에 마음껏 내 마음을 활활 태워볼 수 있었다고. 나의 비껴감도 그에게 행운이었길 바라며 쌉싸름한 고통을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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