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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31. 2023

어른 대신 거인이 된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어른이 되어 있는 건 줄 알았다. 엄마옷보다 한참 작은 내 옷장의 옷들을 보면서 상상했다. 그날이 되면 나는 이 옷장 안의 옷을 한 개도 못 입게 될 거라고. 그러면 백화점에 가서 어른 옷을 왕창 사야지. 엄마 따라 갈 때마다 속으로 입고 싶었던 옷들 다 사버려야지. 


빨리 클 줄 알았던 나는 서서히 컸다. 언제 어른이 되어간 줄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다. 내 옷장은 천지가 개벽하듯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고 12세에서 13세 옷으로, 중학교 교복에서 고등학교 교복으로 몇 벌씩 달라졌다. 결국 모든 옷을 바꾸긴 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꽤 오랫 동안 내가 어른이란 걸 잊고 살았다. 화장과 음주처럼 어른에게 허락된 것들을 당당하게 즐기는 재미를 맛봤지만, 그때 느낀 건 금기를 뛰어 넘는 설렘이었을 뿐 어른이 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뒤늦게나마 어른이 된 상징적 순간을 꼽으라면 대학 입학을 앞두고 본가를 나와 서울행 기차를 타던 날이었을 텐데, 정작 나는 그 순간을 전혀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던 건지 그 순간의 기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어른이 되고 있음을 실감한 건 스물여섯, 하숙집과 셰어하우스를 떠나 처음 갖게 된 오롯한 내 집에서였다. 퇴근 후 나보다 몇 살이 더 많은 아파트 복도를 걸어 집으로 올 때, 맞은편에 보이는 불켜진 집들을 바라보면서 언제쯤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곧장 떠오른 답은 3년. 3년 동안 매일 이렇게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면 어느 날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했다. 글을 쓰려면 지금보다 좀 더 힘들어야 한다고. 이제 막 사회에 나온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보다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스물여섯의 내가 짐작했듯 세상에 힘든 일은 차고 넘쳤다. 나를 한껏 내보이기를 즐기던 성격은 한없이 움츠러들려는 마음에 잡아 먹혀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이 많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혼자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넓은 광장보다 좁은 동굴이 좋아졌고, 나만의 동굴을 꾸미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텅 빈 광장으로 나와 공허를 즐겼다. 


1997년, 한우리독서교실에 다니던 아홉 살의 나는 ‘달나라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라는 선생님 말씀에 거인을 만났다고 썼다. 달이 두세 개나 떠 있는 달나라에는 아주 슬픈 표정을 한 거인이 살고 있었다고. 선생님은 아이의 글을 커다란 액자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창고 한 편에 쌓여 있던 액자는 언제 버려졌는지도 모르게 버려졌다. 


‘달나라 여행’ 속 거인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한다. 이 달나라에는 나 혼자 외롭게 살고 있다고. 나는 큰 동굴 속에 산다고. 우리 친구하자고. 나는 그 거인과 밤새도록 놀다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로 떠난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거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고, 다음에는 달나라에서 3~4일간 더 놀아주어야겠다고 나는 썼다.    


눈물이 펑펑. 눈물을 쏟아본 건 언제였을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눈물을 흰자위로 숨기는 대신 내리는 함박눈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내본 건. 어렸을 때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신기한 놀이었다. 눈물이 날 때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먹어보곤 했는데, 놀랍게도 눈물 맛이 매일 달랐다. 조금이라도 슬픈 일이 생기면 엄마 화장대로 달려갔다. 오른손으로 눈물을 맛보고, 왼손에 쥔 휴지로 남는 눈물을 닦았다. 억지 눈물은 달고, 정말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짭쪼롬했다. 펑펑 내리는 눈물의 맛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대신 하루하루의 무게에 짓눌려 약해지는 사람들. 요즘은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지쳐 드러눕는 일이 많다. 드러누우면서 나도 같이 약해진다. 이러다 어렵지만 중요한 일을 할 힘과 의지가 영영 사라지면 어쩌나, 이렇게 내 몸 하나 편한 거에 만족하다 늙어버리면 어쩌나, 그러다 하루 아침에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아기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두려워한다. 두려워하고 겁내면서 몸만 큰 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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