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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11. 2023

가슴과 젖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와 함께 가슴 위로 두 손이 올라온다.

“젖이 곧 돌겠네요.”

젖? 내 가슴으로 젖이 나온다고?




다음 날, 의사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거짓말처럼 가슴이 뜨겁고 단단하고 아프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 가슴 같지 않은 그것을 안고 퇴원 수속을 밟은 후, 산후조리원으로 왔다.

“젖은 잘 나오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가슴이 아파요.”

“좀 보죠.”

“네?”

“젖이 나오나 좀 보죠.”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알았다. 짐을 푼 지 5분이 채 안 된 낯선 방에서 겨우 인사만 나눈 산후조리원 원장에게 내 가슴을 내맡겨야 한다는 걸.

주섬주섬 가슴을 펼친 후, 침대에 누웠다. 곧장 타인의 두 손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의 고통이었지만, 이상하게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이것 보세요.”

그녀가 내 가슴을 두 손으로 꼬집듯 눌렀다. 가슴 위로 나온 하얀 액체. 젖이었다. 나는 젖이 나오는 가슴을 갖게 된 것이다. 젖소 가슴에서 젖이 나오는 걸 TV에서 본 적은 있지만, 내 가슴에서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이제 뭘해야 하지? 뭘해야 할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을 짜서 신생아실에 가져다주세요.”

가슴을 짠다고? 얼마 전에 봤던 드라마 <산후조리원>이 생각났다. 드라마에서 봤던 기계가 방 안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유축기, 젖을 짜는 기계였다.

“깔대기 안 가져오셨죠? 하나 드릴게요.”

플라스틱으로 된 깔대기 모양의 그것을 받고, 그녀의 설명대로 조립했다.

“여기에 가슴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젖이 나올 거예요.”

정말이었다. 한 쪽 가슴에 깔대기를 대고 조금 기다리자, 눈물처럼 뚝뚝 젖이 떨어졌다. 떨어진 젖은 깔대기와 연결된 젖병에 모였다. 모였다, 고 쓰니 꽤나 모인 것 같지만 실상은 젖병 밑바닥을 겨우 채운 수준이었다. ‘이걸 가져다드려도 되나’ 몇 번을 고민하다 내 이름이 적힌 플라스틱 상자에 젖병과 깔대기를 넣고 신생아실로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젖을 짜고 인사를 받았다. 젖의 세계에서 젖을 짜는 건 수고로운 일로 통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생각했던대로 젖을 짜는 건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게 아름다움이 중요했다면, 젖에게는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젖병에 그인 열두 개의 눈금. 그건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할 열두 단계였다. 언젠간 맨 윗줄의 눈금을 정복하리라 마음 먹고 젖을 짰지만, 겨우 맨 아랫줄 눈금에 도달한 것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다른 성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얼마를 짜든 똑같은 인사를 받는다는 것.

 

“콩콩이가 오늘 5킬로를 넘었어요!”

콩콩이는 맞은편 방 산모가 낳은 아기의 태명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4킬로가 넘었다는 아기는 한눈에 봐도 100일은 넘어 보였다. 하루에 세 시간 있는 모자동실 시간을 빼고는 줄곧 혼자 지내는 다른 산모들과 달리, 콩콩이 엄마는 24시간 방에서 아기와 함께 있으며 젖을 물렸다.

“콩콩이 엄마는 분유 보충을 한 번도 안 하는 날도 있다면서요?”

어느 엄마가 물었다. 대부분의 아기들은 젖을  먹은 후 부족한 양만큼을 분유로 보충받고 있었는데, 콩콩이는 온전히 유만 먹고 자란다는 거였다.

“저는 젖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아기가 가끔 켁켁거려요.”

부러웠다. 밤마다 젖을 짜고,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 목욕을 마친 아기를 데려다 젖을 물리고, 매일 원장실 옆 침대에 누워 가슴마사지를 받았지만 젖은 늘지 않았다.


“완모(완전 모유수유)는 어렵겠지만, 분유랑 같이 먹이면서 키워보세요.”

조리원 퇴소 전날, 완모불가 판정과 함께 이제껏 아기가 보충받은 분유량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이건 그냥 완분(완전 분유수유) 아기가 먹는 양이잖아?’

그랬다. 우리 아기에게 내 모유는 본격적인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한 모금 마시는 에피타이저였던 것이다.


퇴소 후, 뒤늦게 모유수유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시간마다 직수(아기에게 직접 젖을 수유하는 것)나 유축을 해야 젖양이 는다는 것. 새벽 여섯 시에 목욕콜을 받는다는 것으로 만족하기에 젖의 세계는 엄격했다. 산모들은 출산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세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 젖을 짜고 있었다. 나빼고 모두가! 모두가 아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남편과 엄마마저 단유(젖을 끊는 것) 권하던 그때, 나의 모유투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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